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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 본 편은 2차대전의 주요 전쟁사였던 독일군 전격전, 영국 항공전, 미드웨이 해전, 그리고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을 앞에서 독자제위께 소개한 뒤, 편집자 측의 특별 요청에 의해 과외편 격으로 다루게 되었네요. 우리가 학창시절 세계사 시간에 일본 측이 명명한 ‘노몬한 사건’(‘39년 5/11~9/16) 정도로만 기억했었는데 소련군과의 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이 이 전투를 애써 축소하며 상세하게 언급하기를 꺼려했기에 우리에게도 잠깐 스쳐지나간 소규모 국경분쟁 사건으로만 간주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몽골군+소련군 대 만주군+일본군’
김재민의 2차대전사
미디어빌
2022.07.12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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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성 포위작전 고안과 실행) ◆ 역포위 작전의 고안 배경 앞 회 마지막 부분에서 서술했듯이 ‘42년 11월 말 독일군의 스탈린그라드 완전 점령이 이제 목전에 들이닥쳤다고 믿어졌을 때 소련군 지휘부(스타브카)는 유일하게 포위되지 않은 볼가강 동쪽 연안의 교두보를 지키기 위해 갓 들어온 신병부터 정비병, 행정병, 취사병까지 닥치는 대로 투입하며 마지막 순간을 버텼다. 결국 독일군도 극심한 병력소모를 당해 이들을 쓸어버릴 예비전력의 고갈을 통탄하며 마지막 한 뼘 지역을 점령하지 못한 채 공방전이 교착전에 빠져드는 것을 덩그러니 지켜볼
김재민의 2차대전사
미디어빌
2022.06.27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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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격돌 직전 상황) ◆ 獨蘇 양군의 교착 속에서 소련의 위기 상황 계속 전편에서 살펴봤듯이 독일군은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점령을 목전에 두고 주코프의 소련군과 증오 및 공포심에 빠진 민중의 필사적 저항에다 동장군을 만나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히틀러의 무리한 현지 사수 명령에 따라 후퇴 시기도 놓쳐 도리어 소련군에 포위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스탈린이 주코프 등 군 수뇌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하며 곤경에 빠진 독일군에 무리한 공격을 몇 번 시도했지만 독일군의 능숙한 방어에 의해 격퇴되었다.
김재민의 2차대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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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6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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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의 쾌속 진공) ◆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생활공간’ 확보전 전개 1941년 6월22일 히틀러는 영국을 완전히 굴복시키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오랜 숙원이던 독일 아리안 민족의 ‘생활공간’(Lebensraum) 확보를 위해 '슬라브 열등인종'들이 차지하고 있는 소련 땅 공격을 더 이상은 늦출 수가 없어 ‘바르바롯사’라는 작전명으로 이탈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동맹군 병력을 포함한 300만(146개 사단) 병력을 동원해 북부, 중부, 남부 3방면에서 침공전을 전개했다. 처음 한 달간 이들은 전격전 전술교리에 따라 전차부대가 적진
김재민의 2차대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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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6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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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의 전략적 목표) ◆ 일측의 전략적 목표 앞 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진주만 기습의 성공에도 미국이 도쿄 공습과 산호초 해전으로 반격해오자 일 군부는 차제에 태평양함대를 통해 미 해군의 항모 전력을 소멸시키고자 미국령 미드웨이 섬을 침공하겠다는 야마모토 참모부가 예전에 세워놓은 전략 계획을 서둘러 실행하고자 했다.전략적 목표는 미드웨이 섬 공략과 그를 통해 남아 있는 미 항모단을 유인 격파해 태평양의 제해권을 획득하는 데 있었다. 야마모토 참모부는 진주만 기습의 성공으로 미 해군과의 전력 차를 압도적이라고 과신해 미드웨이 섬을
김재민의 2차대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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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02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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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본 해전은 1942년 6/4~6/7일 사이 일본의 태평양 함대와 미국의 태평양 함대가 하와이 북서쪽 2,100 Km 지점에 위치한 미드웨이 섬 근교 해역에서 태평양 제해권을 놓고 양국 항모 7척(일 4척, 미 3척)이 투입되어 대격돌한 끝에 미측의 완승으로 끝난 역사적 해전이었다. 초기 상황은 일본의 압도적인 우세 속에 맞이했지만 일측의 경적(輕敵) 마인드, 정보전 실패, 전략목표의 분산, 미측의 행운과 저돌적 과감성 요인들이 어울려 불과 6분 만에 일측의 주력항모 3척이 한꺼번에 격파당해 침몰하는 대참사로 본 해전의 클라
김재민의 2차대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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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8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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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회에서 살펴봤듯이 독일 측은 8/13일 ‘독수리의 날’ 대공세 이후 예상보다 강한 영국의 대항전에 적지 않은 항공기 손실을 입었지만 우세한 물량 소모전으로 영국 공군을 끌어들였다. 영독 간 항공기 손실비는 독일이 항상 더 높았지만 8월 말에 다가가자 영국 역시 소모전으로 인해 방어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줄어드는 스핏파이어기와 숙련 조종사 수, 그리고 점점 정교하게 높아지는 독일 측의 주요 공군기지들과 군비생산공장에 대한 주간 폭격과 야간폭격 성공률 등이 다우닝의 우려심을 크게 솟구치게 해 그의 매사튼튼 기조를 적지 않게 흔들
김재민의 2차대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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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9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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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공군의 본토 항공전 개시) 본토 항공전을 펼치기 전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둔 탐색전 격인 해협전투를 통해 영독 양측은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초전 때 자신감에 넘치던 독일 공군은 이 기간 동안 영국의 2배가 넘는 손실을 입었다. 자신들이 압도적이라 분석한 사전정보들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격추된 대부분이 저속의 폭격기와 쌍발 전폭기인 메서슈밋-110들이었지만 이런 격추비가 계속된다면 영국 공군 제압이 생각보다 쉽지 않겠다는 일말의 불안감도 커졌다. 하지만 영국 역시 수적으로는 더 많은 적기 격추가 있었지만 독일 에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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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7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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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본토 상륙의 문제: 독일의 고민과 강화회담에의 기대) 프랑스 전투는 전체 7주가 걸렸다지만 실제로는 단 3주 만에 영불 연합군이 패퇴를 거듭하다 덩케르크에서 절망적으로 내몰린 전광석화 같은 단기전이었다. 연합군은 이 암울한 시기에 히틀러의 갑작스런 신중함과 오판으로 토끼가 용궁 탈출하듯 34만 대병력이 기적처럼 구사일생으로 영국 땅에 귀환했다. 모처럼 항전론자 처칠의 정치적·외교적 승리였다. 하지만 전투는 영국 정부가 독일과의 화평을 원하지 않는다면 유럽대륙을 넘어 섬나라 영국에서 상당히 불리하게 속개될 형상이었다. 불독같이
김재민의 2차대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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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4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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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스칸디나비아전이 마무리지어지지 않았음에도 이 정도면 연합국의 이 지역 영향력 행사를 일단 저지했다 보고, 공격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기 위해 ‘40년 4월 말에 들어서자 서부전선에서 총공세를 전개했다.1차대전 때 독일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한 알프레드 폰 쉴리펜이 입안한 이 지역 공략계획(전쟁발발 시 독일이 벨기에를 전광석화처럼 관통해 북프랑스를 낫질하듯 공격함)처럼 연합국 측과 독일 측 모두가 이 계획을 염두에 둔 서로 간의 공격과 방어 전략에 대해 약간의 변주는 있을
김재민의 2차대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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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8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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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이 무렵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을 점유하려 한 이유는 숙적인 영국 역시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간파하고 특히 노르웨이를 독일에 넘겨주지 않으려 했던 대치상황 때문이었다. 앞으로 북대서양에서 펼쳐질 연합국 호송선단과 자국 함대 및 U-보트들과의 수상전에서 유리한 환경을 차지하려면 노르웨이 항구들의 확보는 필수적이었고 이는 영국 측도 마찬가지였다. 다음으로 스웨덴에서 산출되어 독일로 공급되는 생명줄 같은 전략물자인 철광석의 안정적 수급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도 부동항인 노르웨이 나르빅항 확보는 결코 간
김재민의 2차대전사
미디어빌
2021.12.15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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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에도 지속될 미중패권 다툼과 그로 인한 대만 무력충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설, 일본 기시다 정권의 국방력 증대 발표 등으로 자칫 3차대전의 발발이 가까워진 게 아닌가 하는 세간의 우려가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다. 차제에 83년 전인 1939년에 발발해 1945년에 끝난 2차대전을 살펴보고 그 엄청난 전쟁 피해와 각국 호전파들의 어리석음을 되새겨보는 것도 시의적절할 것 같아 2차대전의 주요 4대 전쟁이었던, ➀ 독일군의 전격전, ➁ 영국본토 항공전, ➂ 미드웨이 해전, ➃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에 대해 시리즈 글로 소개하려
김재민의 2차대전사
미디어빌
2021.12.12 15: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