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영국 본토 항공전 제1회

(영국본토 상륙의 문제: 독일의 고민과 강화회담에의 기대)

 

프랑스 전투는 전체 7주가 걸렸다지만 실제로는 단 3주 만에 영불 연합군이 패퇴를 거듭하다 덩케르크에서 절망적으로 내몰린 전광석화 같은 단기전이었다. 연합군은 이 암울한 시기에 히틀러의 갑작스런 신중함과 오판으로 토끼가 용궁 탈출하듯 34만 대병력이 기적처럼 구사일생으로 영국 땅에 귀환했다. 모처럼 항전론자 처칠의 정치적·외교적 승리였다.

대독 항전을 선언하는 처칠의 ’40년 6/4일 의회연설. photo 김재민
대독 항전을 선언하는 처칠의 ’40년 6/4일 의회연설. photo 김재민

하지만 전투는 영국 정부가 독일과의 화평을 원하지 않는다면 유럽대륙을 넘어 섬나라 영국에서 상당히 불리하게 속개될 형상이었다. 불독같이 강인한 처칠이 전시내각 수반으로 건재하며 의회연설에서 히틀러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는 대독(對獨) 항전을 위해 자국민에게 피와 땀, 그리고 눈물 감내를 요구하자 강화회담은커녕 결사항전의 분위기가 내면 속 불안감 속에서도 영국민들 사이에 더 크게 팽배했다. ‘브리튼 전투는 이제 불가피해졌다.

 

문제는 유럽 최강의 독일 육군이 세계 최강의 영국 해군력을 뚫고 영국 본토에 어떻게 상륙하는 가였다. 히틀러는 천년왕국의 생활공간’(Lebensraum) 확보를 위한 필생의 과제로서 가슴에 품고 있는 대소련 공격을 1년 안에 집중하려면 고슴도치처럼 서쪽에서 웅크리고 있는 고립무원의 영국을 최종적으로 점령하든가, 강화조약을 맺어 서부전선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기에 먼저 후자에 기대를 걸었다.

 

당시 프랑스를 3주 만에 군사적으로 굴복시킨 독일 육군의 전격전 수행능력에 전 세계가 경악하며 감탄하던 차제에 처칠의 단독저항 의지는 어찌 보면 허세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처칠이 믿고 있던 구석은 막강한 해군력과 함께 덩케르크에서 탈주한 본토 방어에 단기적으로는 충분한 육군병력, 그리고 독일의 공군력에 필적하지는 못하지만 국내 항공방어전에서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자국 공군력에 있었다.

도버해협에서의 공중전 photo 김재민
도버해협에서의 공중전 photo 김재민

어떻게든 버텨내면 대공황의 경제불황 돌파에 여념 없는 미국 루즈벨트의 참전의지를 고취시켜 세계 최강의 동맹군을 얻게 될 터이고, 그리 되면 장기소모전에 약한 독일을 조만간 굴복시킬 수 있으리라는 믿음 속에 독일 측에서 타진해 오는 강화제안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 특히 히틀러가 이전의 외교협상 무대에서 하나를 양보하면 두 개, 세 개를 또 요구하는 철면피형 양아치 정치가임을 익히 보아온 처칠로서는 당연한 의사결정이었다.

 

(선뜻 상륙전을 펼치지 못하는 독일군의 현황)

 

대륙에서 경이로운 전격전 승리를 이끈 육군과 공군력에 비해 독일 해군력은 영국에 비해 크게 열세라 대규모 병력의 단독적 도하(바다사자) 작전은 수행불가하다고 해군 지휘부는 히틀러에게 보고했다. 그나마 유지되었던 독일 해군의 전함, 순양함, 구축함이 노르웨이전에서 영국 해군에 상당수 피침되었기에 지금의 해군력만으로 독일 육군의 영불해협 단독 도하가 도저히 난감하다는 것이었다.

 

심기가 불편해진 히틀러에게 나치스 2인자이자 허세쟁이 공군장관 헤어만 괴링이 영국에 비해 압도적이라 믿는 루프트봐페(독일 공군)로 영국 본토를 융단폭격하면 영국의 항전의지를 꺾을 것이라고 건의해 왔다. 하지만 육군의 병행진격 없이 공군력만으로는 영국을 결코 굴복시킬 수 없다는 반대의견에도 히틀러는 영국과의 강화를 기대하며 괴링의 단독 폭격안을 수용했다.

 

다만 괴링의 공중공격을 군사적 요충지로만 제한시켰다. 그때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영국이 단독 항전할 것이라고는 결코 믿지 않았기에 영국이 공습발표에 굴복해 화평을 제안하면 빠른 독소전(獨蘇戰) 개시를 위해 최대로 관대한 조건으로 받아들이려 했다.

 

하지만 전시수상 처칠은 항전을 단호히 선포했고, 영국 국민의 저항의지를 고취시키기 위해 영국을 드나드는 연안해역에 민간상선들이 독일공군기들에 피폭당하기를 바라는 듯 자국 공군의 호위도 붙이지 않았다. 사실 방어용 항공전력을 소모하지 않으려 했기에 민간선 호위 여력이 없을 수도 있는 게 더 타당한 이유이었겠지만..

 

(해협 전투의 시작과 경과)

 

히틀러 역시 영국이 강화조약을 거부할 경우 플랜 B와 같은 다른 준비를 하고는 있었다. ‘406/30일 그는 OKW(독일국방군 최고사령부)에 구체적인 침공계획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라이벌 사령부 조직인 OKH(독일육군 최고사령부)는 히틀러의 결정에 불만을 표시했다.

 

이제 막 프랑스를 점령했고, 별도 지시에 따라 대소련 침공계획에 착수한 마당에 다시 대영(對英)침공계획을 병행해서 세우라 하니 일관성 있고 스케일과 깊이 있는 전략계획 수립을 히틀러 스스로가 그때그때의 임시변통적인 전략 마인드로 망가뜨리는 듯싶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개전 초에 독일이 영불연합군과 싸웠다면 영국 본토에 대한 연결공격도 충분히 염두에 두고 많은 시뮬레이션을 통해 불확실성과 시행착오적 요인들을 개선해 나가는 공격계획을 세우는 게 맞았다.

 

하지만 히틀러가 영국과의 화평안에 큰 기대를 거는 입장을 거두지 않았기 때문에 치밀한 대영공격 계획수립에 대한 동기부여가 확 떨어져 막상 공격하는 쪽으로 전략 방향성이 선회하자 노출되는 허술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장 상륙병력을 태울 선박이 부족해 강을 운행하는 바지선까지 동원해야 할 만큼 독일군의 상륙전 능력은 한참 부족했다.

시행되지 못한 독일 측의 ‘바다사자’ 작전계획. photo 김재민
시행되지 못한 독일 측의 ‘바다사자’ 작전계획. photo 김재민

어쨌든 여러 불완전한 요인들이 뚜렷했지만 OKW가 주도하여 약 70만의 독일 육군을 상륙시켜 영국 본토를 점령하려고 수립한 계획이 바로 바다사자 작전이었다. 독일 해군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는 OKW의 침공계획안을 처음 접했을 때 우리는 그저 하는 데까지 싸우다 죽는 수밖에 없다고 한탄할 만큼 상륙전을 주도할 독일 해군의 능력은 작전수행을 절반이라도 행할 수 있을까 의심할 정도로 절대 부족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작전계획을 짠 OKW가 해군의 과대평가된 능력을 내심 채워주리라 기대한 것은 독일공군력에 있었다. ‘30년대 중반 히틀러의 재무장 선언 후 독일국방군(Wehrmacht)에서 가장 큰 발전 드라이브를 건 것은 공군력 확장이었다. 그로 인해 개전 시 폴란드·노르웨이·프랑스에서 행해진 전격전에서 기갑부대와 합동작전을 펼쳐 가공할 적진 돌파력을 보여준 대활약으로 이어졌다.

 

OKW는 막강한 독일 루프트봐페(공군)가 영국 해군과 공군을 제압해 준다면 침공군이 조만간 영국 본토에 상륙해 교두보를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사실 이것은 당시 독일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이었다. 거기에다 덩케르크에서 연합군의 대탈주를 막는 데 실패한 공군장관 괴링은 어떻게든 명예회복을 대영국 항공전에서 하리라 결심하고 OKW보다 더 바싹 달려들었다.

 

(영독 공군력과 항공전 전략 비교)

 

독일 측 바다사자 작전의 결정적인 성공전제가 될 독일 공군의 영국 공군(RAF, 로열 에어포스) 궤멸과 런던을 제외한 영국 남부 주요 인프라들에 대한 맹폭이 초기의 독일 루프트봐페의 주요 전략적 목표였다. 그리하여 ‘407/10~8월 초순까지의 기간에는 영독 양 공군의 상대전략 및 항공전 능력에 대한 탐색전이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두고 펼쳐졌다.

영국의 레이더 방공망 photo 김재민
영국의 레이더 방공망 photo 김재민

이를 통해 독일 공군은 이 해협전투들을 통해 자기들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리라 여겼던 영국 공군이 생각보다 강한 방어능력을 가졌고, 그들의 주력 전투기였던 스핏파이어가 자신들의 메서슈밋-109에 못지않은 성능을 가졌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더 나은 전투능력을 가졌음을 인정했다.

해협전투들의 전초전을 통해 양 공군의 전략적 방향성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먼저 영국 공군은 전투기 부문 총사령관 휴 다우딩의 냉철하고도 효율적인 본토 방어전략이 각 전략지역에 산포된 각 전투비행단들 간에 유기성과 통합성을 높이면서 펼쳐졌다.

 

이를 위해 다우딩은 ’30년대 초부터 레이더망과 통합중앙관제 시스템을 꾸준히 구축해 드디어 격화된 영국항공전에서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었다. 레이더망과 중앙관제시스템의 혁신성을 진작에 알아보고, 그것들의 실전적 숙련성을 끊임없이 연마해 온 덕분이었다.

개전 직전 영국 전투비행단의 방어관할구역 photo 김재민
개전 직전 영국 전투비행단의 방어관할구역 photo 김재민

영국 내에서도 논란은 있었지만 주력 전투기의 낭비적 투입 금지를 통해 자국의 방공능력을 극대화했다. 그리하여 개전 초 총 500여 기의 4개 전투비행단을 영불 및 북부 해변지역에만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본토영공 수호 외에는 스핏파이어의 투입을 단호하게 막았는데 독일 공군의 항공기 투입 물량전이 심화될수록 그의 판단이 옳았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독일 항공함대의 소재지와 공격구역 photo 김재민
독일 항공함대의 소재지와 공격구역 photo 김재민

여기에 대한 독일 공군의 대영항공전은 영국 전투기의 11 교환소모 전략이 그 골격을 이루었다, 영국 공군이 보유하고 있는 주력 전투기의 수를 볼 때 자국기와 11의 비율로 격추해 간다면 영국 영공에서의 제공권을 잡는 것은 시간문제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부정확한 정보들로 인해 향후 전개될 상황들에 대한 독일 측의 예상오산이었다는 점이 전투를 거듭하며 밝혀졌다.

 

독일 공군 사령부는 레이더의 존재와 영국 공군의 잔여 전력을 과소평가해 자국기 2200여 대로 최소 11의 격추 소모전이면 영국 방공능력은 확실히 고갈되리라 과신했지만, 강화조약 기대로 한 달여 공격을 미룬 동안 영국은 전투기 월생산량을 독일보다 더 늘린 데다 효율적인 방공시스템으로 강력한 방어능력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절정의 에이스기 맞수 스핏파이어와 메서슈밋-109)

 

영국 항공전에서 양측의 에이스 전투기로 끝까지 팽팽하게 맞장을 뜬 영국의 스핏파이어와 독일의 메서슈밋-109의 접전들은 2차대전 초반 항공전에 숱한 화제를 몰고 온 백미라 아니할 수 없었다.

영국 공군(RAF)의 에이스기 스핏파이어(Spitfire) photo 김재민
영국 공군(RAF)의 에이스기 스핏파이어(Spitfire) photo 김재민

고립무원의 영국을 지켜준 영국 공군의 에이스 전투기 스핏파이어는 1920년 중반 수퍼마린사의 천재 설계자 레지널드 미첼이 롤스로이스 엔진을 장착한 1호기를 우아한 타원형 날개설계로 선보이자말자 다우딩을 비롯한 고위 공군 관계자들을 매료시켜 곧바로 양산체계에 들어갔다.

 

’36년 처녀비행을 한 스핏파이어에서 가장 혁신적인 부분은 사각형 동심튜브를 서로 연결한 날개보로써 새의 날개와도 같은 유연성을 확보해 주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11분 내 7500M 고도상승과 9000M 고도에서 시속 563Km로 비행이 가능하게 했다.

 

그리하여 영국 상공에 출현한 독일 측의 하인켈-111과 융커스-87(슈투카), 도르니에-17 폭격기의 천적 같은 사냥꾼이었을 뿐만 아니라 맞수 전투기 메서슈밋-109를 전투기 간 공중전에 끌어들여 격추시키고 당하기도 했지만 자국 폭격기 호위를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한 전략적 목표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다른 한편, 독일 공군이 자랑한 메서슈밋-109’34년 설계자이긴 했지만 사업가적 속성이 더 강했던 빌리 메서슈밋이 바이에른항공기제작사를 통해 메르체데스 벤츠 엔진을 장착한 시제기를 개발한 뒤 개선을 거듭해 소개되었다. 이 메서슈밋-109는 공군 관계자들 간 알력으로 인한 우여곡절을 겪고서야 독일 항공부에 의해 양산전투기로 간택되어 독일 공군의 주력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독일 공군(Luftwaffe)의 최강 전투기 Bf(메서슈밋)-109 photo 김재민
독일 공군(Luftwaffe)의 최강 전투기 Bf(메서슈밋)-109 photo 김재민

가장 얇은 날개와 가벼운 중량으로 최고 속도의 기동성과 고도상승 및 고속 급강하가 가능해 고공전에서는 거의 무적이었지만, 날개항력을 줄이기 위해 2정의 기관포만 장착 가능한 비좁은 무장 및 연료공간 문제로 영국 항공전에서 커다란 약점으로 드러난 짧은 체공시간을 극복하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경합한 하인켈사의 He-112 전투기에 비해 거의 모든 측면에서 우세했기에 양산기종으로 낙점을 받은 것이었다.

 

스핏파이어에 비해 설계기술과 스펙면에서 약간 우세하거나 열세의 부분들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팽팽한 맞수라고 평가받는 가운데, 실전에서는 ‘36~’38년 스페인 내전에 투입된 경험을 통해 보다 더 적합한 노하우로 장비와 조종사 생존율에 있어 우위적 요인을 점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공중전에서는 날개 기관총이 꼭 필요하고 가급적 빨리 기관총보다는 기관포로 대체해야 한다는 점과 조종사의 사망이나 부상을 줄여주는 자동봉합식 연료탱크및 급강하시 원활한 연료보급을 위해 기화기 대신 연료직접분사기술개발에서 영국보다 한발 앞서 눈뜰 수 있었던 점이었다.

 

(세컨 주력기 허리케인 vs. 메서슈밋-110)

 

전쟁 개시 전 영국에서는 독일과 달리 전투기 생산투자를 분리해 두 종류의 서로 다른 전투기를 만들고 있었다. 스핏파이어를 만드는 수퍼마린사의 경쟁사인 호커사의 설계기사 시드니 캠은 단일기종에 매달리지 않으려는 영국 항공성의 요청에 따라 허리케인을 양산 설계했다.

 

스핏파이어의 속도와 기동성에는 못 미치나 제조 및 수리와 조종이 더 용이하고, 무장공간과 기체의 견고성, 생산비용에서 우수해 영국 항공전 때 독일 폭격기의 주력 사냥꾼 역할을 톡톡히 했다. 스핏파이어와 같은 롤스로이스 멀린 엔진을 사용했지만, 기체 외부의 일부는 금속이 아닌 천으로 입혀져 지상요원들에게 쉬운 개보수를 가능하게 했다.

영국 공군의 허리케인 전투단 photo 김재민
영국 공군의 허리케인 전투단 photo 김재민

양측의 에이스기들보다 얇지 않은 튼튼한 날개 설계는 20밀리 기관포 4정이나 40밀리 기관포를 2정이나 장착할 수 있게 하여 북아프리카 사막전에서 대전차공격기로 이름을 날렸으며, 기체의 생존성이 우수해 적의 맹공을 받아도 조종사의 안전착륙률을 크게 높였다.

 

영국 항공전에서도 스피드와 고도상승은 스핏파이어에 못 미쳤지만 제조와 수리의 용이함으로 양측의 초반 소모전에서 먼저 불리해진 영국 공군에 빠른 보충생산기들을 제공해줘 중반 무렵의 패전위기를 넘어가게 하는 데 결정적인 버팀 역할을 수행했다.

독일 공군의 장거리 2인승 쌍발전폭기 Bf(메서슈밋)-110 photo 김재민
독일 공군의 장거리 2인승 쌍발전폭기 Bf(메서슈밋)-110 photo 김재민

한편 메서슈밋-110은 메서슈밋-109가 짧은 체공시간으로 영국본토 폭격기들의 호위를 오래 할 수 없게 되자 체공시간도 늘리고 스스로가 빠른 폭격도 할 수 있는 늘씬한 장거리 쌍발 2인승의 전폭기 기종으로 개발되었다.

 

기존 폭격기였던 도르니에, 하인켈스 및 급강하 폭격기 융커스 87에 비해서는 속도와 공격무장면에서 훨씬 앞섰고, 늘어난 체공시간으로 상황에 따라 이들의 호위기 역할도 했다.

 

하지만 강력한 무장을 한 기체중량에 비해 추력이 상대적으로 약했고, 기동성도 영국 주력 전투기들에는 대적되지 않아 얼마 못 가 이들의 만만한 사냥감이 되어 오히려 메사슈밋-109의 호위를 받아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독일 공군에서 상당한 항공기수 비중을 차지했지만, 영국 항공전에서는 상대의 세컨 에이스 허리케인의 활약에 크게 못 미치는 어정쩡한 오리가 되었다.

 

(양측의 소규모 편대 공중전으로 상호 탐색 속에 격화로 돌입)

 

앞에서 언급한 대로 처칠 정부는 대국민 항전의지 고취를 위해 의도적이거나 불가피하게 자국 상선을 군사적 보호 없이 해협을 다니게 했고, 독일 공군은 그 의도를 어느 정도 알아챘지만 영국 공군의 실력 탐지와 항공기 소모를 유도하기 위해 이들 선박을 공격하는 태세를 취했다.

 

영국공군사령부는 충분한 전투기 확보 시까지 대규모 교전을 삼가려 하며 자국민 사기 앙양과 조종사들의 경험 확보, 그리고 레이더망 및 중앙통제관리 시스템의 가동 숙련도 연마를 위해 제한적인 소규모 편대의 대응출격만을 6월 내내 허용했다.

소규모 편대로 저고도에 있는 독일 폭격기대를 공격하려는 스핏파이어기. photo 김재민
소규모 편대로 저고도에 있는 독일 폭격기대를 공격하려는 스핏파이어기. photo 김재민

7/11일 독일 공군이 해협의 영국 해군과 상선단을 본격 제거하기 위해 평소 5배인 70대의 항공기로 집중공격을 개시하자 영국 공군의 대응 항공기 투입 건수 역시 늘어나며 해협 전투는 8/11일까지 격화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 해협 전투들을 통해 독일은 예상보다 강한 영국의 대응에 꽤 놀랐지만, 그럼에도 이 상태로만 유지되면 영국 공군의 전력은 조만간 바닥날 것이라 낙관하게 되었다. 반면 영국 측은 독일에 2배가 넘는 항공기 손실을 입혔지만, 대부분 저속 폭격기와 2선급인 Bf-110 전폭기류라 자국 전투기와 조종사 손실이 이런 11식이면 안된다고 여겨 독일 공군의 효율적인 전투기 편대대형을 벤치마킹하고 조종사 생존율과 재투입률을 높이는 방안들을 고안하게 되었다.

김재민 작가·경영 컨설턴트 photo 김재민
김재민 작가·경영 컨설턴트 photo 김재민
<필자 소개> 김재민은 한국외대 독일어과, 연세대 대학원 경영학과를 나온 뒤 산업경제연구원에 근무하다 도독(渡獨)하여 함부르크대와 함부르크 국방대에서 경영학 디플롬과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 경영학 분야에서는 글로벌경영, 전략경영, 마케팅, 창업경영, 인문경영 분야를 주력으로 연구하고 강의했다. 이 과정을 현대경제연구원, 현대중공업, 부산 경성대에서 근무하며 수행하다 2020년 퇴임 이후에는 본격적인 프리랜서 글쓰기 작가와 스타트업 기업들의 경영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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