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영국 본토 항공전 제3회

6회에서 살펴봤듯이 독일 측은 8/13독수리의 날대공세 이후 예상보다 강한 영국의 대항전에 적지 않은 항공기 손실을 입었지만 우세한 물량 소모전으로 영국 공군을 끌어들였다. 영독 간 항공기 손실비는 독일이 항상 더 높았지만 8월 말에 다가가자 영국 역시 소모전으로 인해 방어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런던 상공을 배회하는 독일 폭격기. photo 김재민
런던 상공을 배회하는 독일 폭격기. photo 김재민

줄어드는 스핏파이어기와 숙련 조종사 수, 그리고 점점 정교하게 높아지는 독일 측의 주요 공군기지들과 군비생산공장에 대한 주간 폭격과 야간폭격 성공률 등이 다우닝의 우려심을 크게 솟구치게 해 그의 매사튼튼 기조를 적지 않게 흔들었다. 손실된 전투기 수는 생산과 재생의 달인 비버 브룩에 의해 비교적 빨리 재공급되었으나 조종사 수의 재보충은 쉽지 않은 난제였다.

 

영국 땅에 망명한 폴란드, 체코, 루마니아, 벨기에, 프랑스계 조종사들과 의용군으로 지원한 캐나다, 뉴질랜드, 남아공, 미국인 조종사들로 국별 편대를 구성해 조종사 부족 문제를 어느 정도는 메꿔야 했다. 영어권에서 온 외인 조종사들과는 달리 영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동구권 조종사들의 낮은 편대비행 군기와 중앙집중 관제시스템과의 교신문제는 이들의 활용을 크게 제한했다.

 

다우딩의 머리를 더 아프게 한 것은 빼어난 독일 공군의 야간폭격 실력이었다. ‘크닉케바인’(Knickebein)이라 불리는 두 전자파의 교차점을 통해 칠흑 같은 밤에도 폭격대상물을 제대로 파악해 정교하게 때리는 기술을 구사하는 것이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영국 전투기들 역시 야간에 독일 폭격기들을 요격할 수 있는 전투 능력을 갖춰야 하는데 아직 그 기능을 갖춘 전투기는 개발되지 않았다.

 

이래저래 8월 말과 9월 초를 거쳐 중순으로 갈수록 영국 공군의 방어력은 최저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쯤 되면 히틀러와 괴링이 그토록 고대하던 영국본토에서의 제공권을 독일이 잡게 되어 북프랑스 지역에 포진해 있는 독일 육군 70만을 사상 처음 영국본토 상륙전에 투입하여 바다사자작전을 바야흐로 개시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런던 폭격 금기를 어긴 독일 폭격기의 오폭. photo 김재민
런던 폭격 금기를 어긴 독일 폭격기의 오폭. photo 김재민

영국 공군 전체에 패배라는 단어가 급속히 물들어가던 즈음 사태를 대반전시키는 기폭점이 된 사건이 발생했다. 그때까지 히틀러에 의해 금기시되었던 런던폭격이라는 실수를 독일 폭격대가 타지역 공격 와중에 우연찮게 행했고, 이게 나비효과를 불러일으켜 히틀러로 하여금 군사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 목적에 더 치중한 런던맹폭이라는 대악수를 두게 한 것이었다.

 

(런던 폭격 실수가 야기한 나비효과)

 

8/24일 독일 폭격대의 일부가 일기불순과 항법오류로 방향을 잃고 런던 근교에서 헤매다 대공포화와 영국 전투기의 요격을 받고는 황급히 도주 중 폭탄을 런던 상공에 목표 없이 투척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실질적 피해는 경미했지만, 처칠 정부는 이 사건을 영국민의 공포심을 완화하고 미국을 비롯한 대내외에 항전의지를 과시할 계기로 삼기 위해 정치적 보복을 결의했다.

베를린 폭격을 감행한 영국 휘틀리 폭격기. photo 김재민
베를린 폭격을 감행한 영국 휘틀리 폭격기. photo 김재민

폭격기사령부에 문의한 결과, 베를린 폭격이 24시간 안에 가능하다는 답변을 듣자 처칠은 날씨가 가능하다면 바로 시행하라고 명령했다. 8/25일 밤 폭격기사령부는 휘틀리와 웰링턴, 햄든 등 80대의 폭격기를 동원하여 승전 무드에 취해 있던 베를린에 야간공습을 가해 독일국민을 아연하게 했다. 날씨가 좋지 않았던 26일을 제외하고는 29일 밤까지 매일 폭격을 가했다.

복수의 런던 폭격을 천명하는 히틀러. photo 김재민
복수의 런던 폭격을 천명하는 히틀러. photo 김재민

베를린과 근교 산업시설물들에 대한 폭격이었고, 성과 자체는 미미했지만 히틀러와 괴링이 받은 충격은 예상 이상이었다. 자국 국민들에게 정치 및 군사지도자의 체면이 많이 손상된 히틀러는 9/7일 처칠 정부의 도를 넘는 베를린 폭격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영국 측이 걸어온 도시폭격 도전에 우리는 열 배, 백 배, 천 배의 폭탄을 투하하여 그들의 도시들을 잿더미화할 만큼 압도적 보복으로 응전하겠다고 선언했다.

 

영국 공군의 항공전 패배를 목전에 두고, 히틀러의 감정적이고 정치적인 런던폭격을 강력하게 만류해야 할 괴링은 오히려 같이 흥분하여 히틀러의 결정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고 지지를 표명했다. 영국 공군을 거의 코너까지 몰아갔던 군사적 성과들을 옆으로 제쳐놓은 채 런던공습이라는 카드에 독일공군 전력을 올인하는 운명적 대악수를 히틀러와 함께 두고야 만 것이었다. 그야말로 독일 공군에게는 다 잡은 승리 기회를 눈앞에서 날려버리는 통한의 순간이었다.

 

(영국민의 의연한 항전 의지)

 

히틀러와 괴링은 이왕지사 런던폭격으로 전략을 대수정했지만 어쩌면 영국민에게 폭격의 공포심과 일상의 스트레스를 극대화하여 영국 측의 항복이나 화평안을 끌어내는 데는 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9/8일 행해진 첫 런던폭격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동안 독일 공군이 남동부 노선으로만 영국본토를 공격해 왔기에 여기에 맞춰진 레이더망과 대공포화망, 대항 전투기 발진코스 등이 이때는 거의 먹혀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독일 공군이 표식으로 남겨놓은 세인트 폴 대성당과 근교 폭격. photo 김재민
독일 공군이 표식으로 남겨놓은 세인트 폴 대성당과 근교 폭격. photo 김재민

독일 폭격대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유유히 소기의 폭격임무를 수행하였고, 이는 괴링에게 커다란 만족감을 주었다. 9/8일에도 별다른 피해 없이 런던을 폭격할 수 있었다. 11전투비행단이 파괴된 자신들의 군사시설과 전투기 등을 복구하고 보충하느라 미들랜드에 위치한 12전투비행단만이 그들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양국 전투비행단의 대치도 photo 김재민
양국 전투비행단의 대치도 photo 김재민

그러나 9/9일이 되자 어느 정도 전력을 회복한 11비행단이 출격하여 해협상공에서부터 런던 직전까지 독일 폭격대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더 늘어난 폭격거리 때문에 메사슈밋-109의 호위는 불과 5~10분 정도만 받게 되자 이들이 퇴각한 후 영국 전투기에 의한 독일 폭격기의 격추 피해가 급증했다.

항전의지가 충만한 런던 소방대원. photo 김재민
항전의지가 충만한 런던 소방대원. photo 김재민

결국 9/11일 독일공군 지휘부가 주간폭격 중단을 선언하자 폭격기 손실은 줄일 수 있었지만 영국 전투기의 소모를 유도하는 계획 역시 틀어지고 말았다. 이후 런던에 대한 야간공습은 10월 말까지 70일 가량이나 더 계속되었지만 의미 있는 전략적 폭격은 되지 않은 채 그냥 관성적이고 정치적인 공격으로 퇴보하였다. 런던 시민들에게 공포심은커녕 분노감 또는 더불어 같이 지내는 생활환경으로 인식되어 영국민의 항전 자긍심만 고취시켰다.

 

폭격기간 동안 전체 5만명 이상의 민간인 희생과 엄청난 가옥 및 공공시설물들의 파괴가 있었지만, 런던시민들은 계층과 종교를 불문하고 단 한번도 절대공황 상태에 빠진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사상 초유의 재난 앞에서 두려움에 떨기도 했지만, 효과적인 방공호 대피와 공습 이후 즉각적인 복구를 통해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다.

폭격의 공포감이 없어 보이는 시민들의 지하역 방공호 대피. photo 김재민
폭격의 공포감이 없어 보이는 시민들의 지하역 방공호 대피. photo 김재민

시민들 모두가 영웅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자기만 살겠다고 비겁한 행위를 한 사람은 극히 적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상식적이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며 대독전(對獨戰)에 대한 자신의 담대한 저항의지에 대해 적지 않은 자긍심까지 품었다. 아울러 유화적 지도자에 의한 정권교체도 요구하지 않았다. 지금 같은 전시상황에서는 처칠 같은 강단 있는 지도자가 더 적임이라는 공감대가 광범위하게 전파되었기 때문이었다.

 

(다 죽어가던 영국 공군의 극적인 기사회생)

 

8월 말부터 본격화된 독일 측의 파상공세에 영국도 주어진 조건들을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하며 최선을 다해 대적했으나 독일 공군의 물량소모전에 어쩔 수 없이 걸려들자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불리해졌다. 독일이 초기의 시행착오를 극복하는 학습효과에 의해 점점 주요 공군기지와 전투기 생산공장에까지 폭격성공률을 높여가자 영국 전투기사령부는 9/6일 붕괴 직전까지 갔다.

11전투비행단의 관할 하부 섹터 photo 김재민
11전투비행단의 관할 하부 섹터 photo 김재민

그러다 오폭이라는 우연으로 야기된 런던폭격이란 사건이 나비효과를 일으켜 독일 공군의 군사요충지 중점폭격 전략이 런던 맹폭으로 대전환되자 영국 공군의 핵심주력인 11전투비행단이 피폭된 방공시스템을 복구할 황금 같은 시간을 선사받는 기회를 누리게 되었다. 런던을 맹폭하는 독일 공군을 막아내기 위해 상대적으로 전력이 뒤진 12전투비행단이 고군분투하는 사이 11비행단은 재건에 전력을 다했다.

 

마침내 이틀 후 파괴되었던 11비행단 산하 비행장들이 대부분 복구되었고, 전투기와 조종사 보충도 이루어졌다. 독일 측의 런던 폭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자신의 항공성내 적들로부터 한참 들었던 다우닝은 이 천금 같은 복구기간을 통해 기사회생한 11비행단을 통해 독일 공군으로부터 받은 것을 돌려줄 때가 되었다고 내심 칼을 갈았다.

영국 전투기에 요격당하는 독일 폭격대. photo 김재민
영국 전투기에 요격당하는 독일 폭격대. photo 김재민

앞에서 언급한대로 9/9일 런던을 향하던 독일 폭격대는 영불해협에 들어서자마자 한 이틀간 보이지 않아 궤멸된 줄 알았던 영국 전투기들이 빠른 속도로 다가와 자신들을 영접하는 것을 보고 불길한 마음을 떨치지 못했다. 독일 공군이 런던에 매달리면서 얻게 된 귀하디귀한 이틀을 통해 전력을 회복한 11비행단 전투기들이었다. 호위하는 독일 전투기들이 나섰지만 폭격기 사냥을 피하지는 못했다.

 

폭격대열은 순식간에 흐트러졌고, 상당수는 바다로 떨어졌다. 11비행단의 저지선을 간신히 돌파해 런던 상공에 다다른 폭격기들은 상공에서 밀집대형으로 포진해 있던 12비행단의 전투기들로부터 또 격심한 요격을 당했다. 체공시간이 다된 호위기 메서슈밋-109가 퇴각하자 남은 폭격대는 들개 같은 영국 전투기들의 밥으로 전락했다. 폭격기들은 뿔뿔이 흩어져 적재 폭탄을 아무 곳에나 떨어뜨리며 황망하게 도주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 사이 재급유와 실탄 재무장을 마친 11비행단 전투기들이 돌아가는 퇴로를 막고서는 마지막 공격을 해대었다. 대륙기지에 귀대한 것이 기적일 정도로 많은 폭격기들이 만신창이가 된 채 격추되었고, 어찌어찌 살아왔어도 재출격이 어려울 만큼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영국 전투기들이 불과 이틀간의 복구와 재정비 기간을 가진 뒤 이렇게 뒤바뀐 상황을 연출하다니 하며 독일공군 지휘부는 혀를 내둘렀다.

 

(‘바다사자상륙작전의 무기한 연기)

 

북프랑스에서 대기 중인 독일 육군의 영국본토 상륙을 감행하려면 해협 날씨가 사나흘간, 최소한 이틀은 연속으로 좋아야 한다는 전제 속에 독일 공군의 제공권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한 선결요건이라고 상륙병력 수송을 맡을 독일 해군의 레더 제독은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는 10월 상륙은 미친 짓이기에 상륙을 하려면 어떻게든 9월 중에 해야 한다고 마감 시한까지 못박았다.

독일 폭격대의 9/15일 총공격 photo 김재민
독일 폭격대의 9/15일 총공격 photo 김재민

6월 말부터 영국 공군과 해협전투를 거쳐 8월부터는 영국본토 항공전을 펼치고 있는 괴링으로서는 영국의 만만찮은 대적능력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제 상황이 상황인지라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 속에 남아 있는 독일 공군의 전력을 총동원하여 영국 공군의 방어전력을 최대한 끌어낸 뒤 일거에 소탕하겠다는 총공격 전략을 수립했다. D-데이는 9/15일로 잡았다.

 

영국 역시 감청을 통해 독일 공군의 전략 의도를 정확하게 알았지만, 어쩌면 이날 전투에서 독일 공군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면 본토항공전의 주도권을 드디어 잡을 수도 있음을 감지하고 650여 전투기 중 가동이 가능한 전투기 500여 기를 총동원하여 괴링의 대규모 공격에 맞불을 놓으려 했다. 모처럼 빅윙론자들이 그토록 바라는 항공전 양상이 스몰윙전()을 선호하던 다우딩과 파크의 동의 아래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9/15일 아침이 되자 영불해협은 런던으로 향하는 독일 공군의 작전기로 가득 찼다. 500여 대의 폭격기와 620여 대의 전투기로 구성된 독일 항공단에 대해 영국 측은 500여 대의 전투기를 동시에 발진시켰다. 50Km에 이르는 공간에서 다시 재현하기 힘든 사상 최대의 항공전 무대가 개최되었다.

양국 공군의 사상 최대 격돌 photo 김재민
양국 공군의 사상 최대 격돌 photo 김재민

곧바로 양측의 스핏파이어와 메서슈밋-109 전투기들이 산개하면서 서로를 향해 발사한 기관총탄의 소음이 상공을 가득 메웠다. 이들이 난전을 벌이는 동안 독일 폭격대는 런던을 향해 비행을 했고 런던 상공에 다다르자 허리케인과 디파이던트 증 2선급 전투기들이 이들을 맞았다. 얼마 되지 않아 수많은 폭격기들이 연기를 뿜으며 추락하기 시작했다.

양국 전투기 간 난타전 photo 김재민
양국 전투기 간 난타전 photo 김재민

영국항공전은 그동안 야간폭격으로 적지 않은 시민들이 죽고 다쳤지만, 이날의 주간 항공전투들은 많은 사람이 관람하는 운동경기와도 같았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직접 본 전투의 모습을 기꺼이 언론에 알렸다. 공중전은 대부분 민간인들의 머리 위 6,000미터 상공에서 푸른 하늘을 어지럽게 수놓는 비행운을 뿌리며 타타타 하는 기총소사도 무음으로 들리며 펼쳐졌다. 하지만 때로는 저공에서도 생생하게 행해졌는데 이때는 수천 명의 시민이 그 장관을 직관했다.

6,000미터 런던 상공에서의 공중전 속 비행구름 photo 김재민
6,000미터 런던 상공에서의 공중전 속 비행구름 photo 김재민

이런 전투를 목격한 영국인들의 사기는 오히려 상승했다. 그때까지 대서양 너머의 일에 애써 무관심하려던 미국인들도 이 전투를 통해 영국 상황에 관심을 갖게 되고, 무적 독일에 굴하지 않고 거침없이 저항하는 영국인들을 존경하게 되었다. 미국 매체에 소개된 다우딩의 젊은 조종사들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독일권을 제외한 전 세계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높은 하늘에서는 양국의 젊은이들이 죽음을 앞에 놓고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 와중에 그 아래 지상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을 유지하는 일상사가 영위되었다. 사람들은 야외나 자기 집 정원에서 밤하늘을 쳐다보듯 공중전을 관람했다. 때때로 창공에서 예고 없이 조종사, 승무원, 빈 탄피, 항공기 잔해 등이 떨어져 내려와도 놀라지 않고 익숙해져 갔다.

 

전투는 하루종일 곳곳에서 격하게 벌어졌지만 독일 측이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독일 호위기들이 귀환한 이후 독일 폭격기들에 대한 사냥전으로 전투가 변모해 갔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이날 끝장을 보려 한 괴링은 폭격대의 심각한 손실을 보고 받았음에도 계속해서 후속 비행대를 발진시켰다. 그러면 연료와 실탄을 재보충받은 영국 전투기들이 이들을 다시 맞이했다.

 

수적으로는 독일이 훨씬 앞섰지만 적진에서 싸우는 불리함이 적지 않아 확연한 우세를 잡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어둠이 짙어지며 하루종일 이어진 9/15일의 총력전은 막을 내렸다. 영국 측이 총 30여 기의 전투기 손실을 본 반면, 독일은 43기의 폭격기와 20여 기의 전투기를 잃은 전과로 인해 영국의 완승으로 기록되어졌다. 유럽 전장터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2차대전의 향방을 가른 첫 번째 분수령이기도 했다.

9/15일의 항공전 승리에 대해 언어적 라임(운율)을 맞춰 기술한 처칠의 찬사. photo 김재민
9/15일의 항공전 승리에 대해 언어적 라임(운율)을 맞춰 기술한 처칠의 찬사. photo 김재민

자신이 겪은 이 전쟁을 전후 세계2차대전사라는 회고록으로 저술해 노벨문학상까지 획득한 문장가 처칠은 이 항공전의 성과를 인류사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적은 이들(1,000여 명의 조종사)에 의해 이렇게 많은 빚을 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라며 매파 정치가 이면에 숨어 있는 언어의 연금술사다운 자신의 문재(文才)를 한껏 뽐내며 기술했다.

 

첫날의 패전적 성과에 분함을 참지 못한 괴링이 즉각 재공습 돌입 준비에 들어갔을 때 독일국방군 최고지휘부(OKW)로부터 비관적 전황을 보고받은 히틀러는 9/17일 괴링과 상륙군을 이끌 A집단군 총사령관 룬트슈테트에게 바다사자 작전의 실행을 무기한 연기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실질적으로는 영국 침공을 포기한다는 의미였다. 영국이 드디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영국 공군의 승리 요인)

 

지금까지 살펴본 영국본토 항공전에서 초기의 대독 열세요인들을 극복하고 무적의 독일 공군에 결국에는 최종 승리를 움켜쥔 영국 측의 승리 요인들을 많은 2차대전사 전문가들은 아래와 같이 정리하였다.

 

1) 다우딩의 통합적 방공시스템(레이다망+중앙집중관제실)의 구축

 

레이더는 사실 독일이 먼저 발명했음에도 다우딩은 이 기기의 방어효능을 바로 알아보고 영국 남부와 중부에 집중 설치했다. 본 레이더망을 통해 침투 적기의 수, 고도, 진행방향을 취합하여 예상루트와 공격목표에 대한 판단정보를 각 관할 비행단에 신속 전파하는 중앙집중관제시스템의 구축 역시 다우딩의 선견지명이 빛나는 혜안에 의거했다.

다우딩 시스템의 작동 조감도 photo 김재민
다우딩 시스템의 작동 조감도 photo 김재민

아울러 지하전화선을 콘크리트로 에워싸 매립함으로써 실전에서 여러 번 있은 독일 공군의 맹폭에도 끄떡없이 방공 연락체계를 유지하게 함으로써 영국 공군을 위기 속에서 자주 구했다.

 

2) 본토방위를 위해 해외원정군과 수송선단의 전투기 호위 포기 종용

 

다우딩은 프랑스 전투에서 승패가 뚜렷해지자 처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본토방위용 전투기 확보를 위해 원정군의 대탈출과 수송선단에 대한 항공호위를 공식석상에서 단호히 거부해 처칠을 곤혹스럽게 했다. 이렇게 전투기 확보에 대해 과도하다 여겨지는 그의 집착은 폭격기사령부와 항공성 내에 수많은 적을 만들었지만 독일과의 본토방어전을 통해 그가 옳았음이 유감없이 증명되었다.

 

다른 한편 전투기사령부 내에서도 독일 공군과 대규모 일전을 갖자는 빅윙 논쟁이 일었음에도 자신의 소규모 대응전이 최선이라 밀고 나가 본토에서의 제공권 확보에 성공한 것도 내부 적들의 비판에 굴하지 않는 다우딩의 꼿꼿한 전술수행 일관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회자되었다.

 

3) 처칠의 강력한 항전의지와 대국민 리더쉽

 

수상에 취임하며 신설한 국방상을 겸임한 처칠은 육해공 삼군 수뇌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방공전에 관해 자주 논란에 선 다우딩을 내심 곤혹스러워 했지만 표면적으로는 끝까지 지지하며 그의 방어전략에 개입을 자제했다.

 

프랑스의 패색이 짙자 다우딩의 이기적인 본토방위 우선전략에 주저했지만 곧 찬성하며, ‘프랑스전이 방금 끝났고, 이제 영국전이 곧 시작되려 한다라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자신의 대독일 강경입장을 전 세계에 천명하는 방송전을 전개하고, 폭격과 과로에 지친 시민과 조종사들을 수시로 현장방문해 위로하는 능란한 쇼맨쉽으로 영국민의 항전의지를 고취시켰다.

철모를 쓴 채 미소 짓는 처칠. photo 김재민
철모를 쓴 채 미소 짓는 처칠. photo 김재민

또 취임 초기 정적들의 끊임없는 유화책 요구에도 냉엄한 판단력으로 히틀러에 대한 강경책을 시종일관 유지하면서도 특유의 유머와 감성적 언변, 루즈벨트와의 인간적 신뢰기반 위에 나치스에 결코 굴복하지 말자는 메시지로 피와 땀과 눈물을 요구하는 대국민 감성 리더십을 유감없이 펼쳤다.

 

마지막으로 영국 내 유화파의 화평안에 대한 기대 속에 대영(對英)공격을 자제하려는 히틀러에게 끊임없이 본토항공전을 도발 유도하고, 거침없는 베를린 폭격이라는 승부수로 런던 폭격전을 이끌어내어 항공전 승리를 잡기 거의 일보 전이었던 독일 공군에게 통한의 패착을 놓게 한 승부사적 정치 호흡의 달인임을 보였다.

 

(독일 공군의 패착적 과오)

 

영국 공군은 그 짧은 기간에 기력을 초스피드로 회복하며 예전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독일 측 입장에서 이 모든 것의 원죄는 런던폭격에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대실책을 인정하기 싫었던 괴링은 조금만 더 물량전을 펼치면 영국 공군의 기세가 다시 꺾일 것이라 믿고 후속 폭격대의 출격을 강약조절 없이 무작정 감행했다. 하지만 같은 상황이 반복되면서 폭격기 손실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독일공군 지휘부는 9/11일부로 주간 폭격을 중단했다.

영국 항공전을 패배로 이끈 군사적 아마추어였던 독일 공군장관 헤어만 괴링. photo 김재민
영국 항공전을 패배로 이끈 군사적 아마추어였던 독일 공군장관 헤어만 괴링. photo 김재민

문제는 자신들의 착오를 깨닫고 런던폭격 이전의 중요 군사물 폭격과 영국전투기 소모 전략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었는데 경직된 히틀러 체제에서 전략 재수정을 감히 간언할 수도 없었고, 괴링 역시 즉흥적인 오기에 젖어 냉철한 전략적 마인드를 가지기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많은 사가들은 괴링이 아닌 항공전 전문가 케셀링이 전권을 갖고 다우딩의 상대로서 독일 공군을 지휘했더라면 최후의 승리를 어쩌면 쟁취하지 않았을까 하는 가설도 토로해 왔다.

 

괴링은 결국 영국 공습시간을 주간에서 야간으로 바꾸었을 뿐, 한때 영국 공군을 위기에 빠뜨렸던 영국 공군의 조직적인 전투역량 제거라는 전략 목표는 더 이상 추구하지 못한 채 다우딩이 원하는 전투국면 속에서 게임 체인저가 아닌 순응적인 게임 참여꾼으로서 영국항공전이 종결될 때까지 그저 끌려만 다녔다.

 

영국 항공전을 연구한 전문가들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력(항공기 보유대수: 2,500, 900)을 갖고도 당시 독일 공군이 승리하지 못한 주요 이유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1) 독일 공군의 태생적 한계: 유럽본토 항공작전을 기본으로 한 공격전략 구사

 

해협을 건너는 영국침공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항속거리가 충분한 주력 전투기와 속도가 빠른 경폭격기를 개발하지 못한 채 영국항공전에 돌입했다. 그 결과는 주력 전투기 메서슈밋-109가 짧은 체공시간 때문에 자국 폭격기 하인켈-111, 융커스-88, 도르니에-17을 제대로 호위하지 못해 영국 전투기들의 요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했다.

 

속도가 빠르고 무장능력이 좋은 경전폭기 메서슈밋-110을 뒤늦게 투입했지만 영국 전투기들에 속도와 기동력에 있어 상대가 되지 못해 메서슈밋-109를 대신하는 호위기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자신이 도리어 사냥감이 되는 실패작으로 판명되었다.

 

거기에다 ‘30년대 말부터 다우딩이 공을 들여 건설한 영국 측의 촘촘한 레이더망과 중앙집중 관제시스템의 기능을 극대화한 방어전략에 대해 특별한 대처방안도 없이 물량만 믿고 안이하게 공격하다 대규모 폭격단이 고공에서 미리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국전투기 부대들에 일방적으로 요격을 당했다.

 

2) 독일 공군 수뇌부의 적 경시와 냉철한 군사전략 마인드 결여

 

초반 21의 항공기수와 조종사 기량의 경험축적(스페인 내전 참전) 우세에도 영국 공군의 통합 시스템에 대한 과소평가로 인해 중폭격기의 격추 손실이 높아 영국의 항전의지를 꺾지 못한 채 도리어 해볼 만하다고 고무시키는 결과를 야기했다.

 

또 독일 정보부의 정보력 부재로 군사요충지 폭격에 초반 오폭률이 아주 높았고, 영국의 전투기 생산증가율과 격추 대수에 대한 과소 및 과대평가로 인해 잔여 전투기 전력에 대해 끝까지 엉터리 정보를 가졌고, 자신들의 암호체계가 노출된 것도 몰랐다.

 

다른 한편 영국에 비해 21 이상의 항공기 손실비를 감수하면서도 시간이 가며 소모전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해 영국 측이 패전의 궁지에 몰린 순간 오폭으로 야기된 런던폭격 사건이 나비효과에 의해 제1의 전략적 목표로 수정되게 한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수뇌부의 아마추어적 군사전략 마인드가 거의 손에 잡을 뻔한 영국전의 승리를 날아가게 했다.

 

<참고문헌>

 

- 마이클 코다, ‘영국전투’, 열린책들, 2014

- 노나카 이쿠지로, ‘전략의 본질’, 북포스, pp. 116~161, 2011

- 존 키건, ‘2차세계대전사’, 청어람 미디어, pp. 135~152, 2004

- 폴 콜리어 외, ‘2차 세계대전’, 플래닛미디어, pp. 134~141, 2008

- 남도현, ‘영국 본토 항공전’ 1~9, 인터넷, 연도 미상

- 베빈 알렉산더, ‘히틀러는 왜 세계정복에 실패했는가’, 홍익출판사, pp. 81~91, 2001

김재민 작가·경영 컨설턴트 photo 김재민
김재민 작가·경영 컨설턴트 photo 김재민
<필자 소개> 김재민은 한국외대 독일어과, 연세대 대학원 경영학과를 나온 뒤 산업경제연구원에 근무하다 도독(渡獨)하여 함부르크대와 함부르크 국방대에서 경영학 디플롬과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 경영학 분야에서는 글로벌경영, 전략경영, 마케팅, 창업경영, 인문경영 분야를 주력으로 연구하고 강의했다. 이 과정을 현대경제연구원, 현대중공업, 부산 경성대에서 근무하며 수행하다 2020년 퇴임 이후에는 본격적인 프리랜서 글쓰기 작가와 스타트업 기업들의 경영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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