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미드웨이 해전 제1회

 

(개요)

 

본 해전은 19426/4~6/7일 사이 일본의 태평양 함대와 미국의 태평양 함대가 하와이 북서쪽 2,100 Km 지점에 위치한 미드웨이 섬 근교 해역에서 태평양 제해권을 놓고 양국 항모 7(4, 3)이 투입되어 대격돌한 끝에 미측의 완승으로 끝난 역사적 해전이었다.

미 해군의 완승으로 끝난 미드웨이 해전 조감도. photo 김재민
미 해군의 완승으로 끝난 미드웨이 해전 조감도. photo 김재민

초기 상황은 일본의 압도적인 우세 속에 맞이했지만 일측의 경적(輕敵) 마인드, 정보전 실패, 전략목표의 분산, 미측의 행운과 저돌적 과감성 요인들이 어울려 불과 6분 만에 일측의 주력항모 3척이 한꺼번에 격파당해 침몰하는 대참사로 본 해전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했다. 남은 일 항모 1척이 치욕의 현장을 빠져나와 복수의 일념으로 미 항모 1척을 피격해 대파했지만 자신도 미 항공대의 공격을 받아 끝내 침몰당했다.

피침되는 일 항모단. photo 김재민
피침되는 일 항모단. photo 김재민

일본이 자랑하던 최신예 항모 4척이 이처럼 허망하게 북태평양에서 수장당하자 미일간 태평양 전쟁이 개전되어 진주만 기습과 동남아 지역에서의 공격 성공으로 미측에 대해 압도적 승기를 잡은 듯한 일본군은 불과 6개월 만에 태평양 전역(戰域)에서 수세에 빠져버렸고, 그 후 종전 때까지 일본제국은 한번도 승기의 냄새를 맡지 못했다.

 

(본 해전의 발발 배경: 진주만 기습과 미측의 도쿄 공습 및 산호초 해전)

 

미드웨이 해전 계획은 대미 단기전을 목표로 진주만 기습을 성공시킨 일 해군의 연합함대 제독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그 참모팀이 미 해군의 잔존 항모 전력을 미드웨이 해역으로 유인해 박멸한다는 전략적 목표를 갖고 입안되었다.

미드웨이 해전을 붙기 전 양 함대의 진로도. photo 김재민
미드웨이 해전을 붙기 전 양 함대의 진로도. photo 김재민

미드웨이 해전의 상론(詳論)으로 바로 들어가기 전에, 본 해전의 1차 원인이 되었던 일본의 진주만 기습과 거기에 대한 미측의 군사적 보복이었던 2차 원인, 즉 도쿄 공습에 대해 그 인과관계를 파악할 경과과정을 기술할 필요가 있겠다.

 

1) 진주만 기습

 

일본의 진주만 기습 동인(動因)

 

- 미국 주도의 원상회복 요구와 경제 압박

 

1937년 중일전쟁 도발로 북중국의 주요 지역을 장악하게 된 일본에 대해 미국과 유럽열강은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훼손되자 점령영토의 원상회복을 점점 강하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이 가장 적극적인 반일 움직임을 보이며 미일무역협정 폐기, 중국군 무기원조, 석유와 철강 수입 차단을 위한 대일 ABCD 포위망 구축 등으로 일본과의 일전을 기정사실화 했다.

 

여기에 영국과 네델란드가 가세하며 본격적인 ABD 포위망이 구축되어 일본을 옥죄게 되었는데 이로 인한 핵심 석유수입선의 차단은 중국과 전쟁 중인 일본에 치명타가 되었다. 1941년 당시 일본의 석유 비축량은 길어야 2, 짧게는 18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철수하거나 서구국가들과 전쟁을 치루더라도 말레이와 인도네시아 등의 남방 석유자원지대를 확보할 것인가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이미 4년간이나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확보한 북중국 영토를 일 육군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일 해군의 수뇌들도 참석한 어전회의에서 대미전을 선포하자고 결정하였다.

 

- 유리한 동아시아 정세 전개

 

대미전 반대론자였던 야마모토 이소로쿠조차 강화회담을 전제로 한 1~2년의 단기전이라면 한번 해볼 만하다고 자신감을 품게 된 데는 ’409월 독일, 이태리와 맺은 삼국동맹의 탓도 있었다. ’417월 프랑스와 네델란드가 독일에 항복하자 일 육군이 이들의 식민지역이었던 인도차이나를 침공하여 석유와 천연고무, 보크사이트 등 전쟁물자를 확보할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일 육군의 말레이 반도 침공 photo 김재민
일 육군의 말레이 반도 침공 photo 김재민

유럽에서 독일군에 내몰리던 영국 역시 동아시아 식민지들을 정상 운영할 수 없었고, 미국 역시 전시체제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은 일본군부에 기습의 유혹을 제공했다. 결국 대미 단기전 승리를 염두에 두고 ’41127일 일 육군의 동남아 전격전 개시 전 경쟁관계에 있던 일 해군은 미태평양 함대를 궤멸시키려 하와이 진주만 기습전에 돌입했다.

 

미 군부의 허를 찌른 기습전의 70% 성공

 

- 지나치게 안이했던 미 군부의 대응태세

 

야마모토 연합함대 총사령관은 제1항공함대를 주축으로 나구모 주이치 중장이 지휘하는 항모기동부대를 조직하여 항모 6, 전함순양함구축함 등 함정 26, 항공기 432대를 동원한 뒤 쿠릴열도 부근 히도카푸만으로 집결시켜 4,800Km나 떨어진 하와이를 향해 항해 중에는 무전교신을 금지하며 비밀 항진을 계속했다.

일 진주만 기습대의 공격경로 photo 김재민
일 진주만 기습대의 공격경로 photo 김재민

’4111월 일본 항모부대가 사라져 전쟁이 임박했다는 여러 징후를 내포한 정보들에도 미 해군은 이 부대가 남방 아시아나 호주 쪽으로 향했을 것이고, 진주만일 것이라고는 결코 믿지 않았다. 심지어는 피습 수일 전 하와이 미 육군 방공 레이더에 북서방향으로부터 수많은 점들이 포착되었음에도 미 본토에서 오고 있는 B-17 폭격기 편대라고 애써 무시했을 정도였다.

 

- 항공공격으로 미 태평양함대 주력 전함 8척 격침 및 대파

 

127일 아침 6, 일 나구모 함대의 1파 공격대는 항모 카가를 떠나 어떤 저항도 받지 않고 7시반 진주만 상공에서 기습성공을 알리는 도라, 도라, 도라!’를 타전한 뒤, 정박 전함들에 어뢰를 발사하는 뇌격 공격을 퍼부었다. 이 공격과 30분 후 항모 아카키에서 발진한 2파 공격에서 미 주력 전함들은 4척이 격침, 4척이 대파되었고, 수많은 순양함, 구축함 및 세워져 있던 P-40 전투기들이 엄청난 파손을 당했다.

일 항공대의 진주만 급습 photo 김재민
일 항공대의 진주만 급습 photo 김재민

하지만 커다란 대어들을 낚았던 기습 성공에도 미 항모 4척은 외부작전 투입으로 군항을 떠났기에 피격을 면했다. 렉싱턴은 미드웨이 섬에, 엔터프라이즈는 웨이크 섬에 항공기들을 수송 중이었고, 사라토가와 요크타운은 샌디에이고 수리창에 입항 중이거나 머물러 있었다.

검은 화염에 휩싸여 침몰하는 전함 아리조나. photo 김재민
검은 화염에 휩싸여 침몰하는 전함 아리조나. photo 김재민

거대한 석유저장창 역시 폭격의 검은 연기 연막 속에서 일 폭격대의 공격을 천우신조로 피해 후일 미 해군이 대반격하는 데 적지 않은 발판이 되었다.

 

지나친 신중함으로 3차 공격 포기

 

- 미 함대 지원인프라의 온존 허용

 

1, 2차 공격을 행한 항공대 지휘관들의 강력한 3차 공격 건의에도 함대사령관 나구모는 소기의 기습전 목표를 달성했다고 여겨 더 이상의 함대전력 손상을 회피하려 모험을 하지 않았다. 일 함대의 현장철수를 가차없이 결정한 것이었다.

 

이는 그가 야마모토 라인이 아니라 대미전의 장기화를 예견하고 항공전보다 수뢰전 전문인 자신을 임명해준 일 해군장관의 해군전력을 온존하라는 막후 명령을 더 따랐기 때문이었다.

검은 연막 속에 폭격 당하지 않은 유조창과 잠수함 기지. photo 김재민
검은 연막 속에 폭격 당하지 않은 유조창과 잠수함 기지. photo 김재민

덕분에 미 해군은 유류저장창, 수리 도크 등의 완전 파괴를 피할 수 있었고, 피침된 8척의 전함 중 6척을 인양하고, 산호해 해전에서 대파된 항모 요크타운도 수리하여 재투입하게 되어 후일을 도모할 수 있었다.

 

- 미 항모들의 생존으로 두리틀 폭격대의 도쿄 공습과 산호해 해전 야기

 

향후 해전에서 주전력이 전함 아닌 항모가 되었기에, 미 항모 4척을 잡지 못한 진주만 기습은 시간이 갈수록 불완전한 것으로 판명되어 ’424월에 일어난 미군의 도쿄 공습과 5월의 산호해 해전은 일 해군에 미드웨이 해전을 하루바삐 도모하도록 채근하였다.

 

2) 두리틀 폭격대의 도쿄 공습

 

진주만 피습의 복수책 고안

 

  • 육해군의 합동작전

 

‘41년 말 진주만 공격을 당한 뒤 미 대통령 루즈벨트는 대국민 사기진작을 위해 본 피습에 대한 보복책을 조속히 수립할 것을 군부에 요구했다. 대통령의 진주만 피습에 버금가는 일본본토 공습 지시에 대해 미 육군은 긴 항속거리를 가진 육상 쌍발 폭격기를 항모에 싣고 일본 방공망에서 멀리 떨어진 해역에서 출격시켜 본토를 기습한다는 계획을 만들어 재가를 받았다.

두리틀 폭격대의 공습 계획도 photo 김재민
두리틀 폭격대의 공습 계획도 photo 김재민

이리하여 구성된 17 폭격대는 폭격기종으로 경합기종 B-26에 비해 이륙거리가 짧은 B-25를 채택하고, 폭격대장으로 항공기 경주인 출신이자 MIT 항공공학 박사증 보유자인 제임스 두리틀 중령이 임명되었기에 두리틀 폭격대로도 불렸다. 본 폭격대는 B-25의 항속거리를 늘리기 위해 무장을 제거하여 기체를 경량화하고, 보조 연료탱크를 공간이 나오는 데마다 설치했다.

항모 호넷에서 발진 준비 중인 B-25 폭격기. photo 김재민
항모 호넷에서 발진 준비 중인 B-25 폭격기. photo 김재민

24기의 폭격기 중 맹훈련 속에 살아남은 16기가 항모 호넷 갑판에 가득 실린 채 4/2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하와이 북방 해역으로 직행했다. 해역 어딘가에서 다른 항모 엔터프라이즈와 그 호위선단을 맞이해 합류했다. 육상 폭격기들을 가득 싣는 바람에 자체 방어력 행사가 어려워진 호넷을 보호하기 위해 엔터프라이즈가 동행하게 된 것이었다.

 

예상보다 일찍 발견되어 출진을 앞당긴 미 폭격대

 

  • 행운이 겹친 도쿄 공습과 남중국해 횡단

 

일본을 향해 20노트의 속력으로 급행하던 미 함대는 4/18일 새벽 함대 진행방향 80Km 전방에서 일측 특수감시정(일반 어선을 징발해 무전기와 기관총을 장치해 개조)과 생각지도 않게 조우했다. 미 함대기와 구축함 등이 감시정을 공격하여 피침시켰지만 일 선원들이 교전 중에 미 함대 발견을 본국에 타전했을 것이 틀림없다고 미측은 간주했다.

후지 산정에 다다른 미 폭격대. photo 김재민
후지 산정에 다다른 미 폭격대. photo 김재민

결국 처음 예정보다 일찍 폭격대를 항모에서 발진시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폭격대는 이륙준비에 돌입했다. 16기의 B-25 폭격기가 1시간 내에 무사히 출격을 완료했다. 원래 예정보다 10시간이나 일찍 출격했지만 출발한 지 5시간 만에 일본본토 해안선을 만나기 시작했다. 우려했던 일본 요격기들은 한 대도 나타나지 않았다.

 

일본 측은 미 함대의 출현 정보를 침몰하는 감시정으로부터 타전받고 즉시 비상 경계령을 내렸지만 미국의 일본토 공격기들이 항속거리가 짧은 단발 함재기들일거라 속단했다. 최대한 일본토에 바짝 접근해서 다음 날 아침에나 공격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 미 폭격기들이 일본 해안을 넘어서고 있는데도 요격기들을 출진시키지 않았다.

도쿄 상공에서 폭탄 투하하는 B-25 폭격대. photo 김재민
도쿄 상공에서 폭탄 투하하는 B-25 폭격대. photo 김재민

일본 육해군 간부 어느 누구도 항속거리가 긴 육상 쌍발기를 미측이 항모에서 발진시킬 것이라는 작전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두리틀 폭격대는 호넷 항모에서 출격한 지 6시간 만인 정오 경에 일본 목표 상공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폭격 목표는 도쿄지역에 집중되었으나 심리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나고야와 고베 등에도 폭격임무가 부여되었다.

 

폭격대는 각자 맡은 지역에 500Kg짜리 적재폭탄들을 투하하고 일본 상공을 지나 착륙지인 남중국 쪽을 향해 기수를 돌렸다. 원래보다 일찍 출격했기에 연료부족으로 남중국 해상을 횡단하는 것이 무리였지만 다행히도 강한 뒷바람을 만나 13시간 여의 장거리 비행 끝에 운 좋게 저장(折江)성 해안에 닿을 수 있었다.

 

  • 해전의 촉발 계기

 

두리틀 폭격대의 도쿄 공습은 사실 군사적 목표 타격이라는 성과와는 거리가 먼 미미한 폭격효과를 거두었지만 그 정치적, 심리적 효과는 생각보다 엄청났다. 루즈벨트를 비롯한 미국민들에게는 진주만의 치욕을 한꺼번에 씻어주는 듯한 트라우마 치유가 되었고, 승전 분위기에 잔뜩 취해 있던 일측에는 어마무시한 충격을 제공했다.

 

특히 일왕이 거처하던 궁 근처에도 폭탄이 떨어진 게 도조를 비롯한 일 군부에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불충으로 받아들여져 어떻게든 남아 있는 미 항모들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군사적 목표임을 깨닫게 했다. 도쿄 공습은 결국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연합함대가 이미 오래 전에 수립한 미 항모단 박멸을 위한 미드웨이 해전 계획이 본격적으로 펼쳐질 시발점으로서 점화되었다.

 

3) 산호해 해전

 

미드웨이 해전의 탐색전

 

  • 최초의 항모 항모전 전개
'42년 4월 일본이 확대하려 한 남방한계선(점선) photo 김재민
'42년 4월 일본이 확대하려 한 남방한계선(점선) photo 김재민

일본은 태평양전 개전 이래 남방 한계선을 확대하기 위해 ’425월 남태평양 솔로몬 제도의 툴라기(Tulagi) 섬을 확보해 이를 발판으로 파푸아 뉴기니의 포트 모르스비(Port Moresby)에 상륙전을 감행하려 했다.

산호해, 툴라기섬, 포트 모레스비의 위치도 photo 김재민
산호해, 툴라기섬, 포트 모레스비의 위치도 photo 김재민

이를 위해 일 해군은 상륙병을 실어나를 두 척의 항모와 한 척의 경항모를 파견하자 미국과 영국은 무선감청을 통해 이 지역에 증파되는 일 항모부대를 저지하려 호주 대륙의 북동쪽 산호해로 시드니와 하와이 방면에 산개해 있던 미 기동부대를 급파했다. 일 항모 쇼가쿠, 즈이가쿠와 경항모 쇼호에 대적하기 위해 미 해군은 항모 요크타운과 렉싱턴을 동원했다.

산호해 해전을 실행하기 위한 양 항모부대의 이동집결로. photo 김재민
산호해 해전을 실행하기 위한 양 항모부대의 이동집결로. photo 김재민

일본군이 저항이 별로 없던 툴라기 섬에 상륙하던 중 요크타운에서 출격한 미 함재기에 요격을 당하자 미 항모부대의 존재를 알아챈 일 해군도 항모들을 동원해 5/7일부터 이틀 간 항모전을 세계 최초로 전개했다. 양측이 육안으로 적함을 보지 않고 함포가 아닌 탑재된 항공기만으로 격돌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서로가 상대의 정확한 위치를 모른 채 깜깜이 식으로 적을 찾아 나서다 발견되면 공격해야만 했기에 수많은 혼동과 오산을 양측이 같이 범했다.

미 함재기 공격에 격침되는 일 경항모 쇼호. photo 김재민
미 함재기 공격에 격침되는 일 경항모 쇼호. photo 김재민

5/7일 미 함재기가 일 경항모 쇼호를 격침시키자, 일 항공기들은 미 항모들을 찾아나서다 미 구축함을 격침시키고 유조선 한 척을 대파했다. 5/8일에는 일 항모 쇼가쿠가 미 해군기들에 의해 크게 파괴되었고, 일 정찰기에 발견되어 일 전투기와 폭격기의 요격을 받은 미 항모 렉싱턴은 아예 침몰하였다. 다른 항모 요크타운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양측의 항모 피해만큼이나 항공기 손실도 걷잡을 수 없이 늘어 본 해전은 이틀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일 항공대에 피폭 당해 침몰되는 미 항모 렉싱턴. photo 김재민
일 항공대에 피폭 당해 침몰되는 미 항모 렉싱턴. photo 김재민
  • 해군에 더 유익한 학습장 제공

 

산호해 해전의 득실은 외관상 일본 측의 전과 우위였다. 경항모 1척 침몰, 항모 대파에 비해 미측은 항모 1척 침몰, 1척 대파, 구축함 1척 침몰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처음에 원했던 포트 모르스비 상륙을 이루지 못했고, 자신이 우위에 있던 숙련된 조종사들을 미군보다 훨씬 많이 잃었기에 전략적으로는 미국도 자신들이 얻은 게 더 많았다고 주장할 만했다.

 

아무튼 본 산호초 해전을 겪으면서도 일 군부는 미 항모부대의 전력이 아직 만만찮음을 인식하고 이의 완전한 박멸이 향후 태평양 전쟁에서 우위를 유지하는 데 불가결한 전제임을 도쿄 피습과 함께 한번 더 크게 깨달았다.

 

미군 역시 본 해전을 통해 앞으로의 해전은 항공기를 동원하는 항모전이 대세임을 절감하고 적보다 한발 빠른 암호문 해독을 통한 색적(索敵) 능력 확보와 항모 건조 및 수리기간 단축에 가일층 노력하며 조만간 다가올 미일 간의 건곤일척 미드웨이 대해전에서의 승리를 위해 본 해전을 복기하고 또 복기했다.

김재민 작가·경영 컨설턴트 photo 김재민
김재민 작가·경영 컨설턴트 photo 김재민

<필자 소개> 김재민은 한국외대 독일어과, 연세대 대학원 경영학과를 나온 뒤 산업경제연구원에 근무하다 도독(渡獨)하여 함부르크대와 함부르크 국방대에서 경영학 디플롬과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 경영학 분야에서는 글로벌경영, 전략경영, 마케팅, 창업경영, 인문경영 분야를 주력으로 연구하고 강의했다. 이 과정을 현대경제연구원, 현대중공업, 부산 경성대에서 근무하며 수행하다 2020년 퇴임 이후에는 본격적인 프리랜서 글쓰기 작가와 스타트업 기업들의 경영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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