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0여, 월 만원' 회원 'Heritage National Trust'!
김종규를 걸레 스님도 구상 시인도 나도 탄복, Respect!
천하의 김종규, 종로 정문헌 코 꿰고 명창 정의진 지갑 열었다!

어제 임권택 감독과 12, 논산의 초절정 고수 송 도사와 극적인 만남.

 

찍고 익산의 거장 이중희 화백의 은거 작업실에서 담소와 동요 부르기...

 

보령의 모란공원, 공동묘지에서 빛나리 임동창을 비롯해 고 강수연까지.

 

그 빡빡했지만 뜻깊어 마춤했던 일정을 끝내고 상경해 조계사 불교역사기념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3, 4대를 이은 명창 정광수의 딸, 의진이 주최한 판소리경연대회장.

정의진 명창 photo e대한경제
정의진 명창 photo e대한경제

끈 떨어진 나도 초청 인사 중 한 명이었다.

 

존경하는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형 양영두 사선문화제전위원회 위원장도 함께.

 

!

 

김종규의 순발력과 능수능란함에 나는 다시 탄복했다.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photo 조선일보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photo 조선일보

걸레 스님, 중광이 왜 그를 천하의 김종규로, 구도자 시인 구상이 왜 그의 차를 지 차처럼 썼는지를 알겠다.  

 

대회장이 김종규였다.

 

명창 의진의 일반부 대상 시상을 빼고, 초 중 고교 대상 수상자에게 시상했다.

 

대상이 겨우 70만원, 장려상은 합죽선 달랑 하나밖에 안 주는 참 빈한한 경연대회.

 

우수 최우수상이 고작 10, 20, 30만원이니...

 

일정이 바쁜 정문헌 종로구청장을 김종규가 단상에 일으켜 세웠다.

 

왕보다 힘이 센 박애리 진행자의 마이크를 미소로 빼앗으며 한 말씀...

 

그 쥐꼬리 상금을 얘기하기 전, 정문헌이 배지 두 번 하고 정무제1장관을 지낸 선친 고 정재철까정 상찬을...

정재철 前정무제1장관 photo 나무위키
정재철 前정무제1장관 photo 나무위키

그러곤 바로 내년엔 이 판소리 대회를 더욱 빛내주시라며 "지갑을 더 열어라"고 슬며시 코를 꿰는 게 아닌가?

정문헌 종로구청장 photo 정문헌 블로그
정문헌 종로구청장 photo 정문헌 블로그

너무 자연스러워 소 같은 정문헌은 지 코가 베였는지, 꿰였는지 모르고 만면의 희색으로 대회장을 떠났다.

 

사회권을 강제로 빼앗긴 말 잘하고, 이쁜 박애리도 김종규를 그저 물끄러미 봤다.

 

그러나 고수 김종규의 코 꿰는 솜씨를 뒤늦게 알아챘다.

 

장내 오신 분들께 "내년 대회는 더욱 커지고 상금도 두둑해질 것"이라고 박수를 유도하며 그를 상찬했다.

 

판소리 경연대회장인 김종규 이름의 상을 받은 사람에겐 지갑을 열어 10만원씩 용돈을 줬다.

 

그 모습을 본 정의진 명창의 지갑도 열렸다.

 

대회 창립자 명창이 고등부 대상 아이에게 70만원 상금에 옷값 30만원을 자비로 보태 100만원 맞춰줬다.

 

입꼬리가 눈에 걸리게 할 장면을 연출해낸 김종규야말로 위대한 문화계 두목이요 문화기획자라 할 만하다.

 

그는 내가 쓰는 졸필의 애독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번씩 만나면 '지필묵 값'(묵대)으로 촌지 봉투를 주시기도 한다.

 

얼마 전, 백성들 마음의 불, 즉 심화(心火)를 끄는 의용소방대라며 봉투에 그 글귀를 써 내민다.

 

참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고마운 어른이다.

 

김종규를 오늘의 그로 우뚝하게 세운 건 바로 피붙이 장형이다.

 

그는 최근 월간조선 8월호에 대문짝만하게 나왔다.

 

거기에서 솔직하게 마당발 인연의 자락들, 은인들도 소개했다.

 

내 인생에 길을 내준 고마운 두 분...”

 

바로 자신의 큰 형 김봉규 삼성출판 창업회장과 이어령 선생이다.

 

어머니 윤금임 여사와 김봉규 삼성출판사 창업회장(오른쪽), 김종규 이사장 photo 월간조선
어머니 윤금임 여사와 김봉규 삼성출판사 창업회장(오른쪽), 김종규 이사장 photo 월간조선

형님이 없었다면 저도 없을 겁니다. 형님이 없었다면 어떻게 학교를 다녔으며, 어떻게 서울로 유학 가서 대학을 마칠 수 있었겠어요. 8세 차이인데 학창 시절, 부모님 대신 학부모 역할을 했으니까요.”

 

  그는 김봉규 회장의 뒤를 이어 1980년 삼성출판사 상무이사, 82년 부사장, 89년 대표이사를 역임한 후 회장을 맡았다.

 

  “형이 출판업에 뛰어들던 시절의 우리나라는 국민소득 100달러의 전형적인 후진국이었습니다. 초근목피와 보릿고개가 엄연하던 시절이었죠. 그런 시절에 누가 책을 사보겠는가 싶었지만 형은 책에 대한 갈증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분은 책과 출판이 한 사회와 문화를 주도하는 산업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김봉규는 19513월 전남 목포에서 대양서점으로 출판계에 입문했다.

 

두 사람은 목포가 지척인 전남 무안 출신이다.

 

나도 묘하게 무안 사람들과 깊은 인연이다.

 

40년 전, 1981년 서울로 상경한 무안 촌놈 김시라(본명 천동)는 내가 피붙이보다 좋아한 형님이었다.

 

그가 꼭 21년 전, 비명에 갔을 때 나는 펑펑 울었다.

 

미국 연수를 가기 직전의 참으로 비통한 순간이었다.

 

그가 살아 있다면, 나는 그와 시너지로 엄청난 문화예술계의 지각변동을 일으켰을 거다.

 

그의 천재성, 예술혼을 나는 인정한다.

 

경상도 통영 욕지가 나의 뿌리요 마음의 고향이다.

 

그리고 해병대 장교 선친 덕분에 해군기지인 진해에서 나고, 포항 김포 서울 등을 떠돌며 컸다.

 

가장 오래 뿌리를 내린 곳은 부산 영도다.

 

경상도 놈이라는 말인데, 나는 경상도보다 호남 사람들이 나를 더 아끼고 좋아한다.

 

지역색 따위는 내가 제일 싫어한다.

 

각설...품바 각설이의 김시라 형이 생각나니 눈물이 나려 한다.

 

아무튼 60년 전, 종규의 맏형은 1962년 서울 종로 관철동에 수도서적을 창업한다.

 

2년 뒤, 삼성출판사를 설립, 소년소녀우량문고(6)를 시작으로 국내 최고의 출판사로 우뚝 섰다.

 

김종규의 은인인 두 분은 숙명적인 관계들일까?

 

삼성출판도 60주년, 문학사상도 50주년, 모두 다 마디 꺾이는 10년 터울들.

 

이어령 편집주간이 문학사상을 창간한 게 1972년이니 말이다.

 

이어령 前문화부 장관 photo 나무위키
이어령 前문화부 장관 photo 나무위키

그해 10월 첫 발행한 문학사상의 창간으로 한국 문단은 풍성해졌다

 

한국 출판 사상 첫 개인작품 선집으로 1966년 출간된 박종화 대표작선집(5)김동리 대표작선집(6), 이듬해 한국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이 된 한국여류문학전집(6)도 기억할 만하다. 당시 출판기념회에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陸英修·1925~1974), 박종화(朴鍾和·1901~1981) 예총 회장, 김활란(金活蘭·1899~1970) 이화여대 총장, 홍종철(洪鍾哲· 1924~1974) 문교부 장관 등이 참석했다.

 

1968년 유주현(柳周鉉·1921~ 1982)의 실록 대하소설 조선총독부는 한국 출판 사상 최초의 한국어(5) 일본어 판 동시패션 출판으로 화제를 모았다.

 

1972년 문학사상 창간은 김종규에게도 평생 못 잊을 추억이다..

 

김종규의 회고.

 

이어령 장관이 삼성출판사 편집고문으로 1960년대부터 참여했지요, 올해로 50주년이 된 문학사상을 창간할 당시 편집주간이 이어령, 발행인이 우리 형님이었습니다.”

 

문학사상은 창간호 발간 일주일 만에 재판에 돌입했을 정도로 돌풍을 일으켰다.

 

순수 문학교양지가 이렇게 세간의 관심을 끌고 선풍적 인기몰이를 한 예가 없었다.

 

김종규는 유료회원을 많이 모아, 그 재원으로 시인 이상의 통인동 집을 매입했다.

 

매입 주체는 바로 그가 이사장 취임 후 유료회원만 15000여 명의 대기록을 세운 문화유산국민신탁이다.

 

늘 그는 사람들을 만나 식사를 하는 자리의 초면에겐 "회원이냐?"고 묻는다.

 

그리곤, 아니라고 하면 바로 그 순간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가입 절차 안내 및 가입을 강제당하게 만든다.

 

너무도 자연스럽고, 천연덕스러워 누구든 그 자리에선 거부를 못한다.

 

그의 포스는 위대할 정도의 천진함이다.   

 

그렇게 나라를 빛낸 문화유산의 보존 유지 관리의 첨병 노릇을 한다.

 

"그런데 문학사상창간호 표지가 이상의 친구 구본웅(具本雄·1906~1953) 화백이 그린 이상 초상이잖아요. 인연이란 게 참으로 묘하다 싶어요."

 

문화계 대통령인 마당발 김종규의 특별한 인연들.

 

나는 그중에도 가장 살가운 게 걸레스님 중광과의 연을 꼽고 싶다.

중광 스님 photo 서울신문
중광 스님 photo 서울신문

내가 뤼스펙트한 몇 안 되는 인물로 4년여 전 하늘의 별이 되신 오현 스님...

 

그분도 걸레를 매우 사랑했다.

 

그가 백담사 행차를 하면 매번 술도 받아주고 용돈도 두둑이 주셨다.

 

걸레와 함께 구도 시인으로 고 김수환 추기경과 막역했던 구상 시인.

 

이 두 분과 김종규는 바늘에 실 같이 매우 징허게 인연이 깊고 질겼다.

 

글을 사랑하고 글과 지낸 한 평생, 그 문학청년 기질에서 비롯한 거다.

 

시인 구상(具常·1919~ 2004)은 참 순수 천진 구도의 삶을 살았다.

 

구상 시인 photo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구상 시인 photo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구상 시인의 시심이나 아무런 사심 없는 구도자적인 무애자적(無碍自適)의 품성을 늘 옆에서 그 그늘이라도 맛볼 수 있음이 얼마나 저에게 다복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 때문에 많은 문화예술계 사람들을 가까이하게 되었지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죠.”

 

그에게 걸레와 구상은 '선다반야(禪茶般若)'와 문자반야'(文字般若)'의 맛과 멋, 격을 깨우쳤다.

 

"저 스스로를 기름지게 했던 분들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의 인맥을 풍성하게 한 견인차이기도 했다.

 

시인 구상과 자주 어울렸던 중광스님과의 에피소드들은 흥미율율(한자 모르는 자들을 비웃는 농담)이다.

 

한번은 1992년 대권 후보로 나선 정주영(鄭周永·1915~2001)이 구상에게 한번 보자고 청을 넣었다.

 

차를 그쪽으로 보낼까요?” “보낼 필요 없습니다. 나도 차 있어요.”

 

재벌회장 따위에게 질 수 없다는 참으로 도저한 글쟁이의 존심이다.

 

자기도 '차가 있다'는 대답을 태연히 해놓고선, 구상 시인은 까마득한 손아래 종규에게 바로 전화했다.

 

종규야! 내 차 보내라!”

 

시인 구상은 종규에게 '차 좀 보내달라'고 부탁할 때마다 지 차도 아니면서 내 차 보내라고 멘트를 날렸다.

 

이런 숨겨진 야그도 있다.

 

걸레 스님을 자처하며 화가로 활동한 중광(重光·1934~2002)1980년대 무렵, 저녁 늦게 종규의 자가용을 빌려 탔다.

 

천하를 제 집으로 여기면서 발 닿는 데가 자고 먹는  제집인 기인 중광.

 

아마 그때는 정처(定處)가 있었던 모양이다.

 

기거하던 화곡동 암자로 걸레 스님이 종규의 자가용으로 돌아간 적이 있었다.

 

예상 시각보다 한참 늦게야, 기사가 창망한 얼굴로 돌아왔다.

 

이유인즉슨, 술에 취한 중광이 차 안에 오줌을 싸버렸다는 거다.

 

세차장에서 차 내부를 깨끗이 청소하고 오다보니 늦어진 것이다.

 

며칠 후 중광을 만난 김종규가 웃음을 꾹 참으며 한마디를 했다.

 

내 차가 벤조구먼, 벤츠보다 한 단계 위 변소까지 달린 벤조!”

 

이 말을 듣고 중광스님이 이렇게 답했다.

 

. 나와 가히 대적할 만한 큰 인물(김종규)일세.”

 

김종규 그릇이 자기와 견줄 만하다는 탄성인 셈이다.

 

이후 나이를 넘어 두 사람의 세교는 더 깊어졌다 한다.

 

그의 모친 윤금임(尹錦任) 여사는 자애롭게 자식을 키웠다.

 

다복했던 집안의 맏이로 의젓했던 김봉규 삼성출판사 창업회장.

 

모친의 자애와 맏형의 지도로 김종규는 출판계를 넘어 문화계 대통령까지 됐다

 

구도하듯 시작(詩作)을 한 구상과 세상을 눙치듯 만행(萬行)한 걸레와는 망년(忘年)지교를 맺었다.

 

세월을, 나이를 잊어버리고 '마음의 벗'이 됐다는 말이다.

 

시대를 풍미한, 글깨나 쓰고 행세깨나 한 강호의 재사 걸물들과 맺은 김종규의 연분은 참 오지고도 징허다.

 

고 이어령 선생과 인연은 다음 회를 기약하시라...

 

아참! 자리를 함께한 최고의 대금연주자로 문화유산국민신탁의 홍보대사 이상현 아우.

이상현 대금 연주자 photo 국립중앙박물관 블로그
이상현 대금 연주자 photo 국립중앙박물관 블로그

그는 김종규의 일일 기사를 자임해 어제 자리에 왔다.

 

조계사 후문의 나주곰탕집에서 즉석 연주로 박수갈채를 받았다.

 

문화기획 대()PD 김종규는 손님들께 일일이 해량을 먼저 구했다

 

자리를 함께한 양영두 사선문화제전위원회 위원장도 애절한 대금 소리, 즉흥연주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찰칵까지...

양영두 사선문화제전위원회 위원장 photo 전북일보
양영두 사선문화제전위원회 위원장 photo 전북일보

영두 형, 80년 전두환 독재 때 DJ를 모시다보니 눈을 하나 잃었다.

 

그런데도 그 엉터리 잡것들도 가슴에 다는 금멧키 배지 하나 못 달았다.

 

그의 적공을 인정해주지 않는 염량세태를 그저 한탄하고 개탄할 뿐이다.

 

이만 총총.(계속)

필자 최영훈 자유일보 주필 photo 최영훈
필자 최영훈 자유일보 주필 photo 최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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