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12일 서대문형무소, 무릎 꿇고 과거사 반성
"일본이 무한책임 자세 가져야 한일 관계 해결될 수 있다"

왜덕산은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내동리에 있다.

전남 진도군 왜덕산 photo 뉴시스
전남 진도군 왜덕산 photo 뉴시스

왜국 수군들에게 덕을 베풀었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명량대첩 당시 이순신에게 대패해 수장된 왜군 시체 100여 구가 떠내려 왔다.

내동리 주민들이 시신을 거두어 왜덕산에 묻어줬다.

왜덕산은 나지막한 언덕으로 밭으로 개간돼 있다.

그 너머는 바로 남해와 접해 있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24일 이곳에서 열린 위령제에 참석했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24일 오전 전남 진도군 고군면 왜덕산 위령제에 참석해 추모사를 하고 있다. 왜덕산에는 1597년 울돌목에서 벌어진 명량해전 때 목숨을 잃은 왜군 수군들의 무덤이 있다. photo 하토야마 트위터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24일 오전 전남 진도군 고군면 왜덕산 위령제에 참석해 추모사를 하고 있다. 왜덕산에는 1597년 울돌목에서 벌어진 명량해전 때 목숨을 잃은 왜군 수군들의 무덤이 있다. photo 하토야마 트위터

오래전부터 왜의 수군 후손들까지 참여해 혼백을 달래는 위령제를 지낸다.

올해 열린 왜덕산 위령제. photo 하토야마 트위터
올해 열린 왜덕산 위령제. photo 하토야마 트위터

왜덕산에는 1597년 명량해전 때 목숨을 잃은 왜국 수군들의 무덤이 있다.

하토야마 전 총리가 왜덕산 위령제에서 묵념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하토야마 전 총리가 왜덕산 위령제에서 묵념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2006815일에도 왜덕산에 묻힌 왜군 후손 20여 명이 내동리를 방문했다.

왜덕산을 참배하고 나서 이들 후손은 내동리 주민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왜덕산의 수군 장수 묘역 앞에는 그의 영정까지 놓여 있다.

묘지는 개간 때 유실돼 100여기 중 54기가 지금 남아 있다.

일본이 무한책임의 자세를 가진다면 한일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이날 정읍시청에서 열린 세계평화 및 한일 문화 경제협력 교류 특별강연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한일 관계의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본 태도가 중요하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위안부와 강제 징용 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한일 관계가 좋지 않다“(일본의) 충분한 사죄가 이뤄지지 않으면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3·1운동에는 일본의 식민 치하에서 벗어나기 위한 운동으로, 당시 많은 생명이 희생됐다이에 대해 일본인으로서 깊이 사죄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하토야마는 앞서 왜덕산 위령제에 참석한 뒤 정읍 태인의 3·1운동 기념탑도 참배했다.

2015812일 방한, 서대문형무소에서 유관순 열사가 수감됐던 감방에 헌화했다.

광장의 추모비 앞에선 무릎을 꿇고 '도게자(?)' 하며 사죄해 한국민의 마음을 움직였다

역대 일본 총리는 물론이거니와정치인 중 공개적으로 사죄한 적이 한 번도 없어서였다.

당시 도게자(땅에 엎드려 조아림)인지를 놓고 일본에서 논란이 들끓었다.

일본에서 최대의 사죄를 뜻하는 도게자인지 한국에서 최대의 경의를 보내는 큰절인지, 확실치 않아서였다.

하토야마는 우크라이나나 중국·대만 문제도 결국 3·1운동과 같은 민족 자결의 문제로, 최근 세계적으로 강화되고 있는 움직임이라며 세계가 앞으로 이런 민족 문제를 잘 해결해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전남 진도 주민들이 명량해전 당시 전사한 왜군들의 위령제를 지내주고 있다많은 일본인이 이를 안다면 한일 관계가 좀 더 좋아질 것이라고도 했다.

왜덕산은 목숨을 잃고 해안가로 밀려온 왜군 시체를 주민들이 시체는 적이 아니다며 수습해 묻어준 곳이다.

왜인들에게 덕을 베풀었다고 해서, 왜덕산으로 이름지었다.

미국을 방문 중인 김영록 전남도지사도 환영의 뜻을 밝혔다.

하토야마가 추모사를 통해 일본의 역사적 과오를 공식 사과하고, ·일 관계 개선을 기원한 것에 대해서다.

하토야마는 진도문화원 왜덕산보존회와 교토평화회 공동주최로 열린 위령제에서, 추모사를 통해 진솔한 사죄를 했다.

"일본이 과거 조선을 침략해 고난의 역사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사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할 때까지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다."

이어 "일본은 위안부, 조선인 강제 징용 문제 등에 대해 더 이상 논의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며 일본의 '무한 책임'을 강조했다.

그는 "일본이 과거 전쟁을 일으키고 식민지화한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지 말고 사죄해야 한다""(임진·정유재란) 당시 진도 백성들이 숨진 일본 수군을 수습해 묻어준 역사적인 장소인 진도 왜덕산에서 용서와 화해를 구하고 싶다"고도 했다.

김영록 지사도 여기에 화답했다.

"일본이 과거 자국이 저지른 역사적 과오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치고, ·일 양국 간 화해와 공존의 분위기를 확대 조성하는 기회를 다지길 바란다."

이어 "1998년 한·일 관계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계승해 한·일 양국이 화해와 공존의 의미를 되새기길 희망한다"고 했다.

하토야마는 올 59일 방한해 취임 전날 윤석열 대통령과 환담했다.

취임식 때도 윤통이 그 자리에 있던 외무장관보다 먼저 포옹해 환대했다.

부인 김건희 여사와 미유키 여사도 케미가 맞아 친한 사이라고 한다.

하토야마는 당시 윤통 부부의 환대에 장문의 친서를 보내 감사를 표했다.

하토야마가 염원하는 동아시아 평화와 안정의 꿈이 이뤄지길 나도 빈다.

이만 총총.(계속)

하토야마 유키오 前일본 총리
하토야마 유키오 前일본 총리

#뱀발...하토야마 유키오

 

그는 일본 제93 총리(내각총리대신)를 지낸 정치인이다.

2009년 야당 민주당 소속으로 일본 역사상 최초로 연립이 아닌, 단독 정당에 의한 정권 교체를 실현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불운해 단 9개월 만에 퇴임, 단명에 그쳤다.

오키나와 주일 미군의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와 정치자금 스캔들중국과 해상분쟁 때 굴욕외교 논란이 겹쳐서였다.

총리를 지낸 조부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과 구별하기 위해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이라 불렀다.

20098월 중의원 총선거에서 그때까지 사상 최다인 308석으로, 대승했다.

정치 스타로 떠오른 그는, 그해 916일 양원의 지명으로 총리에 취임했다.

취임 후, 당과 내각의 구도를 바꿨다.

오카다 가쓰야 간사장을 외무대신으로, 오자와 대표대행을 간사장에 보임했다.

공약 이행을 놓고 자민당과 충돌했고, 연립정당인 사민당국민신당과도 마찰했다.

주요 공약은 아동수당, 고속도로 무료화오키나와의 주일미군 후텐마 기지 이전 등.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로 미국과 사이가 불편해져 대미관계에 먹구름을 드리우게 됐다.

20105월까지 이전을 매듭짓지 못하면 총리직 사임 카드로 친 배수진이 화근이었다.

외교에서 "자주외교"를 표방했다. 특히 친() 아시아적 스탠스를 강하게 취한 바 있다.

동아시아 국가의 "우애"를 강조하면서 나름의 '동아시아 자유주의'라는 새 화두를 던졌다.

중국에 "미국을 배제한 동아시아 질서"를 제안했다.

그 바람에 한국중국과 일본이 모처럼 원만한 외교관계를 형성했다.

집권 초,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기대를 낳으며 출발은 좋았다.

하토야마는 뉴욕 UN 총회에 참석해 그곳에서 후진타오를 만났다.

"대미 관계를 격하하고 중국과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고자 한다."

이 발언으로 미국 조야의 분노(Asia's Reckoning)를 불렀다.

한술 더 떠, 하토야마는 일본 내 핵무기 반입 조약 등 공개, 대테러 전쟁 때 자위대의 미 군함 연료공급 중단, 후텐마 기지 이전을 요구했다.

대미 관계의 악화에 당시 외무성 간부가 "하토야마를 이해할 수 없고 멍청한(stupid) 일을 하고 있다"라며 미국을 달래야 할 정도였다.

하토야마는 아세안+3 회의에서 "미국을 배제한 아시아 공동체를 만들자"는 주장까지 했다.

호주와 베트남이 이를 미국에 알려, 미국은 하토야마 정권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미국과의 외교 참사는 내각 관료와 야당이 하토야마를 무시하는 빌미가 될 수밖에 없었다.

20105월 참의원 본회의에서 마루카와 다마요는 그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야유했다.

결국 사회민주당이 후텐마 미군기지 문제로 연정에서 빠졌다.

선거 패배를 막기 위해 2010 62 사임의 고육책을 썼다.

오자와 간사장도 사임했으며, 후임은 간 나오토 부대표가 맡았다.

외교에서 동맹국 미국과 갈등을 일으킨 게 화를 자초한 셈이었다

하지만 친() 아시아적 외교 스탠스를 퇴임 후에도 자비로 아시아평화센터를 만들어 초지 일관하고 있다.

총리직까지 잃었지만, 아시아 평화를 꾀하려는 초심은 지키고 있다.

재무 관료인 부친 하토야마 이이치로(鳩山威一郎)와 모친 야스코 간 장남으로 1947년 태어났다.

가쿠슈인 -중등과고이시카와 고교와 도쿄대 공대를 거쳐, 1976 스탠퍼드대에서 박사를 취득했다.

그해 도쿄공업대 조수, 1981 센슈대 조교수로 취임했다.

1984년에 정계 입문을 이유로 퇴직한다.

일본 기준으로도 학계에서 상당한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하토야마를 낮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정계에 입문하지 않았다면 이름 있는 공학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하토야마는 4대까지 모두 명문 도쿄대를 나온 뼈대 있는 집안이다.

1975 동반자이자 3살 연상인 하토야마 미유키와 결혼했다.

하토야마 미유키 여사 photo 조선일보
하토야마 미유키 여사 photo 조선일보

다카라즈카 가극단 배우이던 미유키는 20대에 미국으로 무용을 공부하기 위해 건너가, 당시 전 남편과 이혼하고 스탠퍼드 박사인 하토야마와 결혼했다.

유키오의 어머니가 아들 혼사를 위해서 며느리인 미유키의 전 남편에게 죄송하다고 사죄하며 무릎을 꿇었다.

하토야마와 미유키 여사 부부의 젊은 시절, 신혼 초인가? photo 뉴시스/AP
하토야마와 미유키 여사 부부의 젊은 시절, 신혼 초인가? photo 뉴시스/AP

모친의 도움으로 결혼에 성공한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는 주간지 커버스토리에 실려 일본 열도의 화제였다.

하토야마의 모친 야스코는 세계 1위 타이어 제조업체 브리지스톤 창업주인 이시바시 쇼지로의 장녀로 여장부였다. photo 최영훈
하토야마의 모친 야스코는 세계 1위 타이어 제조업체 브리지스톤 창업주인 이시바시 쇼지로의 장녀로 여장부였다. photo 최영훈

모친 야스코는 세계 1위 타이어 제조업체 브리지스톤 창업주인 이시바시 쇼지로의 장녀.

브리지스톤 주식 1200만 주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당시 시가 170억엔에 이른다고 했다

중의원 선거 때 게이샤와의 스캔들에 휘말려 하토야마가 낙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미유키 여사가 "스캔들이 사실이면 남편이 얼마나 외로워서 그랬을까. 참 불쌍하다"라고 남편을 두둔했다.

하토야마는 부인 덕으로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당찬 어머니 야스코가 며느리에게 시킨 거라는 뒷말도 나왔다.

주택공사 스캔들로 정국이 시끄러울 때 야스코는 아들에게 "당장 중의원 배지를 떼어버려!"라고 호통쳤다.

결국 이런 조언이 자민당 탈당의 계기가 됐다.

당선 때 여장부인 모친의 수렴청정까지 거론된 바 있다.

1996년 아들의 민주당 창당 때, 수십억 원의 자금을 용돈에서 지원했다.

모친 야스코는 2013211일 별세했다.

총리대신을 지낸 조부 하토야마 이치로는 1883년에 가즈오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908년에 도쿄제국대학 영미법학과를 졸업한 후, 1915년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

이누카이 내각에서 문부대신을 역임하는 등 정계의 거물로 활동했다.

전후 일본민주당을 결성했고, 1954년 총리가 돼 자민당을 출범시킨다.

그것이 '55년 체제'로 자민당 장기집권의 바탕이다.

하토야마 가문은 두 명의 총리를 배출한 것이다.

하토야마의 조부인 하토야마 이치로 역시 총리를 지냈으며 55년 체제를 출범시켰다. photo 최영훈
하토야마의 조부인 하토야마 이치로 역시 총리를 지냈으며 55년 체제를 출범시켰다. photo 최영훈

그래서 조부 하토야마는 미 주간 타임지 커버의 인물로 등장하기도 했다.

손자는 뉴욕타임스(NYT)가 선정한 영향이 높은 100인에 선정됐다.

필자 최영훈 자유일보 주필 photo 최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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