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 형ㆍ소나무 언덕,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홍천 8경, 모래소 50만 평이 니 꺼 됐다"니!

"인제 가면 언제 오나원통해서 못 살겠네."

 

땅이 꺼질 듯한 깊은 탄식과 푸념이 나왔다.

 

전방인 이곳에 배치된 장병들과 애인들에게서.

내린천의 큰 푸른 색 바위 photo 최영훈
내린천의 큰 푸른 색 바위 photo 최영훈

인제원통군 둘 다 교통이 매우 불편했다.

 

고구려  때 저족현(猪足縣)으로 불렸다.

 

돼지 저에, 발굽 족이니 즐겨 먹는 족발이란 뜻

 

통일신라 경덕왕 때 희제현(狶蹄縣)으로 바뀐다.

 

지금 강릉을 중심으로 한 영동권 명주에 편입됐다.

 

인제라는 명칭은 고려시대부터 등장해 지금에 이른다.

내린천 건너는 돌 징검다리. 여류 이병철 형은 대한민국 최고의 징검다리라고. photo 최영훈
내린천 건너는 돌 징검다리. 여류 이병철 형은 대한민국 최고의 징검다리라고. photo 최영훈

! 기린을 뜻하는, ()과 발굽의 제()로 명명했을까?

 

의견이 갈린다.

 

지형이 기린의 발굽 모양이라는 설도 있다.

 

사슴이 많다보니, 사슴이 기린이 된다는 전설에 따라 그리됐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기린은 상상의 동물.

 

기린은 "용 머리에, 사슴 몸에, 소 꼬리와 말과 같은 발굽과 갈기가 있다"고 한다.

 

사슴을 기린과 동일시했다는 거다.

 

옛 명칭도 짐승의 발굽과 관련이 있다.

 

그러니 이 주장이 설득력이 있을 거다.

 

사슴이 많이 서식했고 그 이름도 기린으로 바뀌었다.

 

1906 토지정리령으로 춘천에서 넘어온 기린면강릉에서 온 내면을 편입한다.

 

인제는 일제 때는 강원도에서 가장 넓었다.

 

무려 2000가 넘었다.

 

그러나 38선 분단으로 남쪽만 홍천에 편입됐다.

 

6·25 후 수복으로 북쪽 서화면 일부를 제외하고 남한에 속했다.

 

인제군이 부활됐으나내면은 홍천군에 넘겼다.

 

1964년 기린면에 상남출장소가 설치된다.

 

1973년 구 해안면을 다시 양구에 넘겼다.

 

복잡한 주고받기를 거쳐 양구군 남면(국토정중앙면)에 속했던 상수내리, 하수내리와 춘성군(춘천시북산면에 속했던 수산리를 편입했다.

 

1979년 인제면이 인제읍으로 승격된다.

 

1983년 기린면 상남출장소가 상남면으로 됐다.

 

기초단체 중 면적 1위인 홍천군 다음으로 인제가 2위다.

 

구역변경과 민통선으로 이 지역은 주인이 없는 곳이 많다.

 

수복지역이나 민통선 위는 3부류가 산다.

 

북에서 왔거나, 군 출신이거나 외지인.

 

인제에는 진부령미시령한계령은비령곰배령 등 이름난 고개들이 많다.

 

상당수 고개가 태백산맥을 넘어 영동을 잇는다.

 

영서권이지만, 영동을 잇는 지점이라 지대가 높다.

 

주거지는 하천을 따라 만들어진 좁은 평지에 있다.

 

기린면을 관통하는 내린천과 서화원통 일대를 관통하는 인북천이 인제읍내에서 만나 소양강이 되고, 다시 소양호로 흘러간다.

 

인제군은 영서 북부, 소양강 유역이기 때문에 춘천 생활권이었다.

 

언어 역시 영서 방언을 사용하므로 영월군평창군정선군과 비슷하다.

 

소양강댐 건설로 춘천으로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이 수몰되었다.

 

44번 국도가 확장되면서 홍천-인제-속초 간 교류가 활발해졌다.

 

따라서 현재는 속초 생활권, 심지어는 동서울 생활권으로 볼 수도 있다.

 

강원도 전방답게 겨울에 매우 춥다.

 

기린면 북리에 자동차 서킷인 인제 스피디움이 개장했다

 

지역 경기 활성화에 다소 기여한 걸까?

 

청정지역이 많은 수려한 산과 강, 자연환경의 보고가 인제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행정구역 상 홍천 쪽인 내린산방은 온종일 물소리로 가득하다.

잠결에도 물소리가 들린다.

 

소피로 새벽녘, 잠에서 깨어나 자연으로 나가면 머리 위에 별이 쏟아진다.

 

은하수가 흐르는 밤하늘, 참 오랜만에 본다.

 

내린천이 금강송으로 울창한 모래소를 휘돌다가 내린산방 앞에서 물살이 빨라지며 콸콸콸 쏴쏴쏴 내는 거친 숨소리일까!

 

이 거센 물소리가 좋다.

 

물소리가 마치 지치고 고단한 심신을 어루만지는 편안한 음악 같다.

 

"남은 생에서 긴장할 것도, 애쓸 것도 없다고 다독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류 형)

 

강원도 한달살이 중인 여류 형의 권유로 내린산방에 왔다.

 

글을 쓰는 지금껏 두 밤을 잤다.

 

이곳은 강원도 산골 중에도 깊은 오지다.

 

세상사를 떠나, 초록이 지쳐 불그레지는 단풍과 푸르른 가을하늘을 한껏 즐길 수 있다.

 

여류 형이 함안의 숲마루재를 떠나 한달살이로 이곳까지 6시간을 달려오신 덕분에 망외의 호사를 누린다.

 

오늘 내린산방을 만든 송현 형의 생업터로 들어서니 가을 풍경이 눈에 잡힌다.

 

길가의 산사나무와 마가목 열매가 붉게 익어가고 색색의 구절초가 활짝 피어 있다.

마가목 나무, 울릉도산 그 붉은 열매와 푸른 하늘과 흰구름...포란지형의 명당에서. photo 최영훈
마가목 나무, 울릉도산 그 붉은 열매와 푸른 하늘과 흰구름...포란지형의 명당에서. photo 최영훈

내린산방 앞 내린천 계곡의 서늘한 물소리와는 또 다른 풍취다.

 

송현 형 내외가 차려놓은 다과를 즐기며 아래 쪽 모래소를 둘러보았다.

 

홍천 8경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송현 형은 도내 첫 캠프장 인가를 몇 년 전 포기했다고 한다.

 

황금알 낳을 거위의 배를 갈라버린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 수군거렸다.

 

7, 8천만 원 들인 비용을 포기하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유혹고뇌라는 단어를 들먹이기도 했다.

 

우리밀 대장인 송현은 끝내 생태를 지키는 선택을 했다.

 

그 결과 여류 형과 우리 부부가 눈몸만 아니라 마음 호강까지 누린다.

 

어제 또 한 사나이를 봤다.

 

한반도 야생동물연구소의 한상훈 박사다.

 

여류 형 페북의 강원도 한달살이를 보고 내린산방으로 온 거다.

 

그는 야생동물 연구자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여류 형과 인연은 반달가슴곰 복원사업 때 자문하는 바람에 실무 책임자인 그를 만나게 됐다.

 

한상훈은 현장 연구에 충실한 연구자다.

 

야생동물연구는 현장을 떠나서는 불가능하다.

 

야생오지를 탐사하며 연구하는 건 고단한 작업이다.

 

"삶의 마지막도 현장인 야생의 필드에서 마무리 했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그런 자세로 깊은 산속에 홀로 비박을 하며 거친 음식으로 살아왔을 거다.

 

"한 박사와 송현, 와운 아우가 함께 만나니 금새 의기투합이다."(여류 형)

 

한 박사의 안내로 강원도의 숨겨진 더 깊은 오지를 탐사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여류 형과 송현 형도 조수기사를 자처한다.

 

한 박사도 기꺼이 가능한 범위에서 안내를 다짐한다.

 

오후에는 모두 함께 송현 형 농장에서 아로니아를 땄다.

채취한 아로니아를 세척하고 있다. photo 최영훈
채취한 아로니아를 세척하고 있다. photo 최영훈

따봐야 돈이 되질 않아 포기 상태로 방치해둔 거다.

 

"힘들게 지은 농작물을 버려두는 건 하늘과 땅에 죄짓는 것"이라는 여류 형 말이 맞다.

 

한 시간 남짓, 수확을 끝낸 뒤 송현 형의 벗이 일군 천상의 화원으로 갔다.

 

거기에도 산사나무와 마가목이, 구절초 맨드라미가 눈을 즐겁게 한다.

 

풍수에서 최고로 치는 포란지형의 지세.

 

새가 알을 품는 듯한 사위가 산들로 둘러싸인 중심만 봉긋 오른 형상.

 

기가 막힌 지세에 포크레인 하나 갖고 들어와 이곳을 조각하고 있는 김준찬 형.

 

송현 형이 이곳의 특별고문이란다.

 

일과를 끝내고 소나무 새순으로 담근 송선주와 150년 난 돌배나무로 3,4년 익힌 돌배주로 입가심도...

 

송현 형, 살아온 굴곡 많고 고단했던 인생 역정을 숨가쁘게 토해낸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삶에는 기복도 성쇠도, 고난도 행복도, 좌절도 희망도...

그런 것들을 씨줄날줄로 엮어나가는 게 바로 인생드라마다.

 

내린산방으로 돌아와 수담을 잠시 하다가 눈꺼풀이 무거워져...

 

"니가 형을 잘 둬 모래소 50만평이 니 꺼다."

 

아침에 내린산방에 내려온 송현 형 말이다.

 

이만 총총.(계속)

필자 최영훈 자유일보 주필 photo 최영훈
필자 최영훈 자유일보 주필 photo 최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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