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김재민

2013. 4. 8.

 

지난 주말 오랜 친우 박 사장의 초청으로 절친인 강 주필과 함께 23일 간의 항저우(杭州) 방문을 짧게 하고 왔다. 80년대 초 삼성 주재원으로 이태리 밀라노에 자리잡은 이래 80년대 후반부터 전 세계를 누비는 방랑 비즈니스맨으로 살아온 박 사장이 모처럼 젊은 날의 추억시간을 함께 가져보자는 기특한 제안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상하이(上海) 아래 있는 항저우(杭州) photo 김재민
상하이(上海) 아래 있는 항저우(杭州) photo 김재민

얼씨구나 하고 주필과 나는 3/29() 저녁 상하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두 시간여의 비행 후 상하이에 도착한 우리는 하루 먼저 가 있던 박 사장이 꼼꼼하게 적어 보내준 안내 메시지에 따라 180km 떨어진 항저우에 가기 위한 항저우행 고속철 출발역을 찾아가야 했다.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는 현지인들에게 중국어로 가는 길을 확인해야만 했는데 나보다 중국어 실력이 많이 나은 주필의 활약으로 큰 문제없이 항저우행 카오티’(고속철) 매표구에 도착했다. 낯선 것은 기차표를 끊는 데도 여권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카오티에 들어서니 우리의 KTX 승차 분위기와 흡사했고, 항저우역에 도착하기까지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던 박 사장과 반갑게 해후한 뒤 이틀간 묵을 유우하오(友好) 호텔로 가 여장을 풀고서는 저녁식사를 하러 나갔다. 중국식당들은 예약 없이 가면 너무 오래 기다린다기에 호텔근처에 있는 한국식당으로 갔다. 먹을 만한 메뉴는 삼계탕과 육개장뿐이었는데 육개장들을 시켜 먹으면서 항저우에 대한 개요 설명을 들었다.

 

바이띠와 쑤띠에 얽힌 백거이와 소동파에 대한 단상

 

항저우는 저장(浙江)성의 성도로 인구 약 700만 명의 중소도시(중국기준에서는)라 했다.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上有天堂 下有蘇杭’(하늘에 천당이 있으면 아래에는 쑤저우(蘇州)와 항저우가 있다)이라 읊을 정도로 멋진 경계와 풍치를 보이는 땅이었다.

 

진시황이 이곳에 첸탕현을 설치한 이후 2천년 이상의 역사를 이어온 중국 6古都(시안, 베이징, 뤄양, 난징, 카이펑, 항저우)에 꼽히며, 1,127~1,276년 기간 남송의 수도였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항저우 시후(西湖) 전도 photo 김재민
항저우 시후(西湖) 전도 photo 김재민

얘기를 듣다보니 내일 하이킹할 시후(西湖)에 대한 역사적 사연들도 서로 귀동냥하고 싶어 밤거리 탐방을 뒤로 미루고 자리를 호텔 바로 옮겼다. 중국 고대사에도 밝은 주필이 시후라는 명칭은 중국 4대미인 (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 중에서도 최고로 친다는 춘추 말기 월의 여인인 서시(西施)를 기념하려는 데서 생겼다 했다.

 

여행책자에서 얻은 정보로는 시후가 삼면의 산으로 둘러싸였으며, 동서 3.3km남북 2,8km둘레 15km의 호수 내에는 3개의 작은 섬이 떠 있다는 사실도 전해주었다.

 

나는 10년 전 한국에 소개되어 읽은 유명 문필가 위치우이(余秋雨)중국문화답사기내용을 다시 상기하며 바이띠(白堤)’쑤띠(蘇堤)’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은 하루에 꼭 한두 차례 시후 둘레길을 속보나 조깅으로 돈다는 박 사장이 기다렸다는 듯 먼저 바이띠에 대해 자신이 아는 정보를 들려 주었다.

책 표지 photo 김재민
책 표지 photo 김재민

바이띠는 시후 내 단교(斷橋)에서 고산(孤山)까지 이어지는 약 1km의 제방으로, 의 대문호 白居易(포추이)가 항주자사 시절 자연재해에 허덕이는 이곳 주민들을 위해 치수 및 관개의 목적으로 만들었다 했다. 지금도 이 주변에는 버드나무와 복숭아나무가 흐드러져서 후세인들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볼거리를 제공하기에 여기서 중국문인들의 애민사상과 자연동화적인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이야기도 곁들였다.

백거이(772~846) photo 김재민
백거이(772~846) photo 김재민

주필이 백거이의 함자 거이중용(中庸)’편에 나오는 군자는 편안한 위치에 서서 천명을 기다린다 (君子居易以侯命)”라는 말에서 취했다고 전해주었다. 또 과거급제 후 관리생활을 하면서도 어려운 민생을 돌보는 데 전념하는 한편, 문인기질로 부조리한 당시 사회상과 조정의 부정부패를 폭로하는 풍유시를 많이 썼다 했다.

 

얘기가 슬슬 무르익어 이번에는 쑤띠에 대한 화두를 내가 꺼내자 기다렸다는 듯 박 사장이 이쪽은 북송의 대시인 蘇東坡(쑤뚱퍼)1089년 경 항주자사 재임 중 백거이와 같은 이유로 주민 20만명을 동원해 건설한 제방이라 전했다. 바이띠보다 더 긴 2.8km에 달하며 중간에 6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는 정보도 주었다.

소동파(1036~1101) photo 김재민
소동파(1036~1101) photo 김재민

소동파에 대해서는 나도 위치추이의 중국문화답사기에서 읽은 내용을 기반으로 인터넷에서 찾아본 이 대시인의 기구한 생애와 시후(西湖)에 얽힌 그의 시세계에 대한 해설 글들을 분위기에 맞춰 슬쩍 펼쳤다. 젊은 시절 청년관료로tj 입바른 소리 잘하며 활달 호방한 시문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동시대의 정치적 라이벌이자 문우였던 왕안석의 급진적인 신법(新法)에 반대하다 좌천되며 문인의 길에 더 집착했다는 사실을 말이었다.

 

좌천길에 떨어져 오지 한직을 돌다 복권되어 나이 50에 두 번째로 항저우 땅에 지방관으로 부임하자 쑤띠를 건설하며 이곳에 흠뻑 빠져 시후에 관련된 시편만 1000수나 쏟아낼 정도였다는 기록을 봤다고 알려주었다. 강 주필이 여기서 이 지역의 명물 동파육에 대한 이바구를 양념으로 들고 나왔다.

 

문호가 쑤띠 개통식 때 자신의 조리법으로 만든 삼겹살용 돈육에 소흥 술로 졸인 고기를 호수 판 백성들에게 대접하니 그 맛이 아주 좋아 동파육으로 불리며 오늘날까지 민간에 전해오며 이 지역 명물로서 자리 잡았다는 것이었다. 소동파가 항저우를 떠난 후 사람들은 그를 기리는 사당을 세우고, 그가 세운 긴 제방을 백거이의 그것과 함께 쑤띠라 부르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다 주필이 시심(詩心)이 도도해졌는지 소 시인이 서시와 시후를 비유하며 읊었다는 유명한 음호상초청후우(飮湖上初晴後雨)’라는 시를 스마트폰에서 찾아내어 해석 내용을 즉석 낭송으로 전해주는 것이었다.

 

넘실거리는 호수 위 반짝이는 햇빛도 좋은데

가랑비 젖은 산색은 비 속에서 더욱 신기하네

가만히 서호를 쳐다보자 서시 모습 떠올라지니

은은했다 화사해지는 그 용색 더도 없이 잘 어울리네

 

이국에서의 밤은 아늑하게 깊어가고 흐르는 흥취 속에 계속 피어나는 이야기꽃은 끝이 없을 듯 했지만, 내일의 현장탐방을 위해 우리는 아쉬운 분위기를 뒤로 하고 각자 방으로 돌아가 객지에서의 첫 밤을 맞았다.

 

옛 꿈을 다시 꾸게 해주는 시후

 

밤 깊이 시간을 보낸 탓인지 평소답지 않게 기상이 늦어졌지만 20층 식당으로 8시반까지 올라오라는 전화 전갈을 받고 시계를 보니 845분이었다. 이미 지나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는데 한국보다 1시간 늦은 이곳 시간으로는 745분이라는 걸 다시 깨달았다.

 

샤워를 끝내고 식당에 입장하니 두 사람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뷔페식이었는데 제공된 먹거리가 비교적 튼실한 편이었다. 첫 음식접시를 가지고 오니까 두 사람이 나타났다. 위에서 굽어보는 시후는 항저우 시내 공기가 정갈하지 않아 그런지 뿌옇게 흐려 보였다. 박 사장은 오후 4시에 비즈니스 미팅이 잡혀 있어 2시까지만 시후 하이킹에 합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식사를 하는 중에 생각이 난 듯 주필이 어제 밤 시후와 엮인 여러 이야기들과 연결해 예로부터 전해오는 이곳 전설적 미인들인 西施. 蘇小小(쑤 샤오샤오)白娘娘(빠이 량량)에 대한 스토리를 꺼내었다. 나도 위치추이 글에서 읽은 바가 있어 바로 구미가 당기는 주제였다.

서시 photo 김재민
서시 photo 김재민

이 친구가 전하는 서시는, 그녀가 시후에 나타나자 물속의 어류들이 헤엄치는 것을 잊고 천천히 강바닥에 가라앉았다 하여 침어’(沈魚)라는 별명까지 얻은 미인이라고 운을 떼었다. 춘추시대 오-월 간 전쟁에서 패한 월의 충신 범려가 미인계로 오왕 부차에게 바치자 부차가 서시만 바라보다 정사를 내팽개쳐 복수를 노리던 월왕 구천에게 나라를 망하게 해 중국역사상 1경국지색’(傾國之色) 미인이라 부연했다.

 

그 다음 샤오샤오는 서시만큼의 미녀는 아니지만 마음에 든 정인에게 바친 꿋꿋하면서도 애틋했던 아가페적 사랑을 제대로 거둬보지도 못한 채 열아홉의 나이로 요절했기에 후세의 수많은 중국 문인들의 심금을 울렸다는 전설적인 명기(名妓)였다. 스토리를 들어보니 우리의 황진이가 바로 떠올라졌다. 한시(漢詩)에도 조예가 깊은 주필이 샤오샤오가 첫사랑 귀공자 완욱(阮郁)과 우연히 첫 대면하는 장면에서 읊었다는 유혹가를 폰에서 찾아 보여주었다.

 

첩승유벽거(妾乘油璧車) 첩은 유벽거(수레)를 타고 있고

랑과청총마(郞跨靑驄馬) 낭군은 청총마에 올라 계시니

하처결동심(何處結同心) 어느 곳에서 맘을 함께할까요?

서릉송백하(西陵松栢下) 서릉의 송백 아래선가요?

 

아니 1500년도 더 된 시절의 연애가()가 이렇게도 생생하고 써늘하게 등골을 관통시키며 와 닿는다는 사실에 섬찟하며 놀랐다. 시후에 모셔져 있다는 샤오샤오의 묘소를 얼른 찾아보고 싶었다. 마지막 빠이 량량 얘기는 시후 주위 하이킹을 하며 다시 나누자고 했다.

 

세 여인의 흔적을 찾아

 

하이킹 복장을 한 채 세 사람은 로비에서 만나 한 1.5km 떨어져 있는 시후의 입구에 들어섰다. 주말인데다 유명 명승지여서 중국 내 관광객들도 많이 운집한 듯 입구 주위와 호수 저 건너편의 길에도 사람들로 인파를 이루었다.

 

눈앞에 펼쳐진 시후 전경에 감탄하며 사진도 찍고 하며 걸어가다 보니 바이띠가 나타났고, 그 북쪽 끝에는 겨울에 눈이 쌓여 중앙부분이 녹기 시작할 때 그 너머 있는 보석산 산정에서는 마치 다리가 끊어진 것처럼 보인다고 단교(斷橋)라 불리는 다리에 도달했다.

단교를 지나며 photo 김재민
단교를 지나며 photo 김재민

3월 말이라 이미 쌓인 눈이 다 녹아 단교잔설의 운치를 느끼지는 못했지만, 일행과 함께 주변 경관에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바이띠를 지나 시후에 있는 유일한 자연섬인 고산(孤山)으로 들어섰다. 섬 주위에 연꽃이 만발하여 옛 문인들의 사랑을 한참 받았다는데 여기서 시후를 다시 굽어보니 저 멀리 또 다른 섬 두 개가 그림처럼 떠있었다.

고산에서 바라본 시후 photo 김재민
고산에서 바라본 시후 photo 김재민

고산을 건너는 중에 한 정자 안에 황금알처럼 생긴 무덤이 있어 살펴보니 현판에 모재정(慕才亭)이라 쓰여 있었다. ’재주를 연모하는 정자라는 뜻이라면 여기가 혹시 명기 샤오샤오를 기리는 묘지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묘비명을 보니 錢塘蘇小小之墓라 적혔고, 양쪽 기둥에는 그 옛날 어느 방문 시인이 남겼다는 싯귀가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다.

 

천재방명류고적(千載芳名留古迹) 수없이 아름다운 이름들이 옛 자취로 남았지만

육조운사저서령(六朝韻事著西冷) 저잣거리 노래소리는 아직도 서령에서 맴도네

모재정 photo 김재민
모재정 photo 김재민
蘇小小의 묘비 및 기둥 글 photo 김재민
蘇小小의 묘비 및 기둥 글 photo 김재민

대충 이런 뜻 같았다. 아하, 그 유명한 항저우 황진이의 무덤이 여기라니 주필과 나는 심봤다는 기분으로 한참을 둘러보았다. 위치우이는 샤오샤오가 첫 사랑 완욱과의 이루지 못할 사랑에 상심하다 마침내 자신의 미색을 길거리에 드러내어 정갈하게 솟아오른 대갓집 담장을 비웃는 명기(名妓)의 길을 택했다고 풀이했다.

 

그러다 과거 볼 노자가 없어 절망에 빠진 젊은 서생 포인에게 선뜻 은자 100냥을 쥐어주며 과거 보러가라 격려할 만큼 어려운 선비에게는 아무런 대가 없이 베풀 줄 아는 따뜻한 마음씨의 여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권세를 가진 고을 수령의 거만한 부름에는 우리의 성춘향처럼 쉽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런 갈등의 스트레스 속에 병을 얻어 19세에 요절하자 바로 뒤 과거급제한 포인이 찾아와 자신의 은인이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을 알고는 목 놓아 통곡한 뒤 장사를 지내주며 모재정을 세우고 묘비명까지 써주었다. 이런 아련한 스토리를 상기하며 우리는 샤오샤오의 그윽하고도 서늘한 향취를 맡고 몸에 배이게 하려 꽤 오래 머물렀다.

 

다시 마주 오는 인파와 승객을 많이 태운 자그만 관광열차들을 헤치고 앞을 가다보니 어느덧 쑤띠 입구에 도달했다. 이곳의 풍경은 사계절 모두 아름답지만 소동파는 안개가 자욱한 봄날 새벽 수양버들 가지에서 꾀꼬리 우는 소리 들으며 볼 때가 단연 최고라고 설파했다.

예로부터 중국인은 수양버들을 미인 상징물로 꼽았다기에 소동파의 말이 수양버들 저 너머에서 서시 환영을 보라는 암시로 들려 쳐다보니, 과연 물고기도 움직임을 멈춘다는 서시 미모에 상통하는 아늑한 경계가 펼쳐졌다.

 

쑤띠를 따라 한참 가다보니 화항관어’(花港觀魚)라는 공원이 나타났다. 공원 내에는 붉은 잉어가 떼 지어 있는 홍어지(紅魚池)500 종의 모란이 핀다는 모란원이 있다 했지만 점심시간이 다 되었기에 입구 근처에서 잠깐 머무를 형편밖에 안 되었다. 이 공원에서 지나온 쑤띠를 굽어보니 저 멀리 뇌봉탑이 보이지 않는가?

화항공원에서 바라본 석양 속 쑤띠와 뇌봉탑 photo 김재민
화항공원에서 바라본 석양 속 쑤띠와 뇌봉탑 photo 김재민

뇌봉탑을 방문하고 싶은 마음은 꿀떡같았지만 박 사장이 오후 4시에 중요한 사업 미팅이 있어 점심시간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이라 일단 이쯤에서 시후 둘레길을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뇌봉탑을 찾아봐야 하는 이유는 시후와 관련된 세 번째 여인 빠이 량량의 스토리가 아로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위치우이는 빠이 량량이 백사(白蛇)가 변신한 전설 속 요녀이자 신선이긴 하지만 찬란한 보통 인간이 되고자 한 그 순수하고 애달픈 소망이 많은 중국 남성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된 궁극의 이유로 들었다. 우리 설화에도 접목된 또 다른 구미호 전설의 사랑 스토리처럼 말이었다.

백사전의 백랑랑 photo 김재민
백사전의 백랑랑 photo 김재민

일찍이 아미산에 살던 영물들인 백사와 청사는 시후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백소정(白素貞)과 백소청(白小靑)의 이름을 가진 두 미녀로 변신해 노닐었다는 데서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허선(許仙)이라는 한 젊은이가 어느 비 오는 날 버드나무 아래 비를 피하고 있는 두 여인에게 우산을 빌려주고 귀가 시 타고 갈 배까지 불러주는 친절을 베풀자 백사인 白素貞이 큰 감동을 받았다.

백소정과 소청 역의 두 여배우 photo 김재민
백소정과 소청 역의 두 여배우 photo 김재민

다음 날 우산을 받으러 찾아온 허선에게 먼저 청혼하여 결혼한 뒤 지닌 약방술로 사람들의 병을 봐주자 사람들은 그녀를 빠이 량량이라 부르며 한껏 호감을 보였다. 이 부부의 행복한 금슬이 항저우 땅에 점점 퍼지자 소문을 들은 금산사 승려 법해(法海)가 량량이 천년 묵은 뱀요괴임을 알아보고 허선을 찾아와 이 사실을 전했다.

 

반신반의하던 허선은 법해의 지시대로 단오날 웅황주를 량량에게 먹여 취하게 했는데 술에 취한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해장국을 만들어 가니 흰 뱀 한 마리가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혼절했다. 잠시 후 깨어난 량량은 거의 죽은 듯 혼절한 남편을 소생시키고자 임신 7개월의 몸으로 영지(靈芝)를 구하려 선산으로 들어갔다.

 

산을 지키던 산도령들과 힘든 싸움을 벌이면서도 남편 소생의 일념으로 물러나지 않는 량량의 열부정신에 감동한 최고 산신 남극선옹의 호의로 영지초를 구해와 허선에게 먹이자 드디어 깨어났다. 소생한 허선은 아내가 고마웠지만 다른 한편으론 여전히 무서웠다. 애써 잊고 좋을 만하면 법해가 나타나 요괴임을 상기시키며 그를 금산사로 데려와 돌아가지 못하게 막았다.

법해와의 대결 photo 김재민
법해와의 대결 photo 김재민

량량은 남편을 찾아오려 白小靑과 함께 나서 법해와의 최후 일전을 벌였다. 임신한 몸이라 힘이 부쳐 이기지 못하고 여동생과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단교까지 이르는 동안 허선과의 행복했던 시절을 상기하자 슬픈 마음이 최고조로 올라왔다. 한편 량량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허선은 동자승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헐레벌떡 뒤달려오니 맥빠진 채 걸어가는 아내의 뒷모습이 너무 안되어 보였다.

 

이제서야 량량의 깊은 정을 뼈저리게 느낀 허선은 아내가 만약 백사라 하더라도 끝까지 백년해로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드디어 갈등은 지나가고 아들까지 낳아 백일잔치에서 행복해 하는데 인간세상의 사도(邪道)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 법해가 또 나타나 허선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량량을 뇌봉탑 아래 가두어 버렸다.

석양 속의 시후 뇌봉탑 photo 김재민
석양 속의 시후 뇌봉탑 photo 김재민

법해의 핍박에 요괴로 돌아갈 수도, 하늘이 원하는 신선으로 승천할 수도 있었지만 바오 량량은 오직 범부와 함께 사는 인간이 되고 싶은 그 열망 하나로 뇌봉탑 아래의 구금도 불사했다는 그 스토리가 온 나라 중국인들을 감격하게 했던 모양이었다.

 

시후의 마지막 밤

 

박 사장이 데리고 가준 중국식당에서 점심으로 쓰촨식 메뉴들을 선택해 맛을 보았다. 내가 깐풍기 같은 요리를 들먹이자 메추리 종류로 만든 요리가 주식으로 들어왔다. 덜 맵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뜻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던지 내게는 무지하게 매웠다. 그럼에도 박 사장이 곰살스레 건져주는 맵지 않은 부분을 날름날름 잘 챙겨 먹었고, 그래도 매운 맛은 현지 맥주의 힘을 빌어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다.

 

원래는 점심을 하고 주필과 나는 시후 탐방을 계속할 요량이었지만 발이 많이 부르튼 이 친구의 하이킹 능력과 낮잠 한숨 자고 싶은 내 소망이 맞아 떨어져 미팅 나간 박 사장이 5시 경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냥 호텔방에서 쉬기로 했다.

 

나는 방에서 잠깐 눈을 붙인 뒤 샤워를 하고 가져온 중국어 교재로 중국어 공부를 했다. 한 두어 시간 지나자 박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와 저녁 먹으러 갈 채비하라는 전갈이 왔다. 식사하고는 자신이 잘 아는 양주 주점에서 항저우의 마지막 밤 시간을 갖자고 했다.

 

점심 때 간 그 중국식당에서 중국식 샤브샤브 요리를 시켰다. 박 사장이 들려주는 중국 비즈니스의 어려움과 자신의 초기 항저우 시절 일화들을 경청한 뒤 주필과 나는 낮에 다녀온 바이띠와 쑤띠 근처 명소 이름들을 서로 물어가며 재확인했다.

항저우식 샤브샤브(훠궈) photo 김재민
항저우식 샤브샤브(훠궈) photo 김재민

박 사장도 자기가 아는 시후 관련 스토리들을 좀 더 생생하게 전해주며 세 여인에 대한 주필의 야사 소개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풍성한 저녁을 마친 뒤 우리는 택시를 타고 박 사장이 예약한 주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안으로 들어가니 여사장이 정중하면서도 격조 있게 우리를 맞았다. 마지막 밤이라는 분위기 속에 조금 이완된 기분으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각자 주량보다 좀 많이 마시게 되었다. 주흥이 꽤 무르익어 가는 중에 짜잔하고 한 인물하는 여인 3명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서로 단체 수인사를 하고 얘기를 나누다 자연스레 눈길을 끄는 여인들에게로 자리를 옮겨 앉게 되었는데 나는 아담한 몸매에 속눈썹이 긴 미인에게 갔다. 아마도 빠이 량량에 꽂혀 있던 터라 가장 비슷한 분위기를 지닌 그녀에게 바로 관심이 일었던 듯싶었다. 내 눈으로 볼 때 주필은 인간적 의리를 중시하는 샤오샤오 같은 분위기의 여인이 파트너가 된 데 흐뭇해하는 눈치였고, 박 물주는 셋 중 가장 글래머였던 서시 캐릭터를 초면이 아닌 지인처럼 자연스레 찜하였다.

 

내 중국어 실력이 우리 셋 중 제일 형편없어 대화장벽이 가장 컸던 반면, 두 사람은 나보다는 훨씬 돈독하게 환담하는 듯 했다. 필담까지 섞어 소통을 하다가도 좋은 음악이 나오면 다 같이 나가 합창하거나 춤을 추며 이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꽤 추억에 남게 잘 보내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중국어가 조금만 더 되었으면 훨씬 흥미로운 시간이 되었을 기회를 제대로 살리진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내 파트너가 외모는 빠이 량량류였지만 지적 수준과 외국인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영어 소통력이 많이 떨어져 중국어 이외의 언어로는 기본적인 의사소통조차 거의 차단되는 상황이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자리가 미스매칭인 것처럼 여겨져 흥미가 점점 떨어져 갔다. 귀한 돈 쓰며 풀 서비스 자리를 마련해준 친구에게 정말 많이 미안할 정도로..

 

그럼에도 나는 박 사장의 통 큰 초대로 얻어걸린 시후 탐방을 계기로 당송 시대의 대문호들과 중국의 역사적 미인들에 대한 새로운 면모들을 공부하고 좀 더 깊이 파악할 수 있었던 게 그 나름의 방문소득이었다고 평가했다. 거기다 그간 일본통인 줄만 알았던 강 주필이 얼마 전부터 중국어 공부에도 발빠른 도전을 하여 중국어 실력과 함께 당송 문인들에 대한 배경지식도 착착 쌓아가는 데서 적지 않은 자극을 받았다.

 

10년 전(2003) 처음 상하이를 방문했을 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다방면에서 뚜렷한 발전을 이룬 최근의 중국 모습을 보니 친구들보다 취약한 중국어 실력을 좀 더 갈고 닦으며 중세에 특히 세계경제를 호령하며 찬란했던 중국문화에 대해서도 더 폭넓은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아울러 국공합작 시대부터 시대역행적인 문화혁명을 거쳐 다시 오늘날의 글로벌경제 시대로 접목하게 된 중국 현대사의 굽이굽이를 좀 더 체계 있고 종합적인 안목으로 살펴보고 싶은 열망 역시 이번 여행을 통해 더욱 더 커졌다.

김재민 작가·경영 컨설턴트 photo 김재민
김재민 작가·경영 컨설턴트 photo 김재민
<필자 소개> 김재민은 한국외대 독일어과, 연세대 대학원 경영학과를 나온 뒤 산업경제연구원에 근무하다 도독(渡獨)하여 함부르크대와 함부르크 국방대에서 경영학 디플롬과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 경영학 분야에서는 글로벌경영, 전략경영, 마케팅, 창업경영, 인문경영 분야를 주력으로 연구하고 강의했다. 이 과정을 현대경제연구원, 현대중공업, 부산 경성대에서 근무하며 수행하다 2020년 퇴임 이후에는 본격적인 프리랜서 글쓰기 작가와 스타트업 기업들의 경영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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