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중국을 점령한 몽골의 침략을 세 차례 막아내

남중국해 분쟁 섬들의 영유권을 둘러싼 중국과 동남아 국가들간의 분쟁양상이 심상찮다. 특히 베트남은 가장 긴장수위가 높아 전면전은 아니더라도 국지전 정도는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두 나라 사이는 한일 관계와 비슷한 편이다. 국민감정, 특히 중국에 대한 베트남 국민들의 감정이 아주 좋지 않다.

중국은 지난 42일 남중국해에서 베트남 어선을 침몰시킨 데 이어 18일에는 베트남과 영유권 분쟁 중인 파라셀 군도와 스프래틀리 군도를 각각 하이난성 싼샤시 산하 시사구와 난사구로 일방적으로 지정했다.

중국과 베트남 사이에 무력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는 모양새다. 전쟁이 일어나면 누가 이길까? 외형만 놓고 보면 게임이 안 된다. IMF(국제통화기금)에 따르면, 중국은 2019GDP(국내총생산) 기준으로 세계 2(1414016300만달러), 베트남은 세계 46(26163700만달러). 경제력이 약 54배나 차이난다. 그러나 전쟁은 반드시 물리력의 차이로만 승패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중국 입장에서 베트남은 껄끄러운 존재다. 2000여년에 걸친 양국 전쟁사에서 아픈 추억이 많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선 중국과의 전쟁 과정에서 국민적 영웅도 많이 나왔다. 그중 최고의 영웅은 베트남의 이순신격인 쩐흥다오(陳興道). 쩐흥다오는 쩐()왕조의 왕족이다. 그의 부친은 쩐왕조의 창업자 태종(太宗)의 형이었다. 초대 황제의 조카인 셈이다. 베트남은 동남아에서 유일하게 한자문화권이다. 과거 조선시대의 한국처럼 과거제가 있었고 모든 인명과 지명은 한자로 적었다. 다만 한자발음은 우리처럼 중국과 다른 발음으로 읽었다.

쩐흥다오는 세 차례에 걸친 원나라의 침략을 막아냈다. 당시 원나라는 세계 최강국이었다. 세계 최강의 몽골기병을 주축으로 예나 지금이나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중국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의 1차침략은 1257년에 이뤄졌다. 베트남을 경유하여 남송(南宋)을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이때 쩐흥다오는 육군과 수군의 지휘를 맡고 있었다. 3만명의 몽골군은 파죽지세로 수도 탕롱(昇龍·하노이)에 입성했다. 그러나 베트남은 수도를 비워준 채 결사항전을 계속했고 몽골군은 무더운 기후를 이기지 못해 9일만에 철수를 시작했다. 쩐왕조의 군대는 이때 반격에 나서 많은 피해를 입혔다.

1260년 쿠빌라이가 즉위하면서 나라이름을 원()으로 고친 몽골은 1279년 남송을 멸한 뒤 베트남에 대해 더 강압적 태도를 보였다. 쿠빌라이 칸(원 세조)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했는지 2차 침략 때는 베트남을 대대적으로 침공했다. 12847월 원 세조는 아들 토곤에게 베트남 공격명령을 내렸고 토곤은 50만 대군을 거느리고 그해 12월 베트남의 록쩌우(祿州·지금의 랑썬)에 다다랐다. 이번에는 누가 봐도 베트남에 승산이 없어보였다. 태상황 성종(聖宗)이 항복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묻자 국공(國公) 쩐흥다오는 먼저 신의 머리를 벤 후에 그렇게 하소서라고 했다. 쩐흥다오는 베트남 사상 유명 격문인 격장사문(檄將士文)’을 지어 전 베트남인들을 감동시켰고, 베트남은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졌다. 이번에도 수도 탕롱성은 함락됐으나 쩐흥다오는 수도에 집착하지 않고 게릴라전과 지구전(持久戰)을 병행했다. 베트남군은 팔꿈치에 살달(殺撻·오랑캐 즉 몽골군을 죽이자)’는 글까지 써가며 전의를 불태웠다.

베트남군은 12854월부터 공세로 전환했다. 베트남군은 쩐흥다오의 지휘하에 원나라 군대를 추격해 응우옛강과 남싸익(男策·현재의 하이즈엉)에서 일대 타격을 가했다. 원나라 장군 수이게투는 전사하고 만다. 이리하여 원의 2차 침입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두 차례의 패배에 격노한 쿠빌라이 칸은 베투남에 대한 재출병을 시도했다. 128711월 병력 82000명과 선박 500척으로 구성된 원나라 군대가 광둥(廣東)과 광시(廣西), 윈난(雲南) 세 방면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이번에도 원나라 군대는 탕롱을 쉽게 점령했으나 베트남군이 게릴라전을 펼쳤기 때문에 실익이 없었다. 원나라 군대는 12883월 초 반 끼엡(萬劫·현재의 반옌)에 집결해 육로와 수로로 나위어 총퇴각을 시작했다.

쩐흥다오는 바익당강(白藤江)에서 후퇴하는 원의 수군을 맞아 일대 격전을 벌였다. 그는 938년 전 응오 꾸옌(吳權)이 남한(南漢·중국 510국의 한 왕조)의 군대를 격파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강에 말뚝을 박고 만조(滿潮) 때 원의 전함을 유인했다가 간조(干潮) 때 이들 전함이 말뚝에 걸리자 공격하여 대승을 거뒀다. 원나라는 결국 베트남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만다.

전쟁이 끝나고 쩐흥다오는 나라에서 흥도왕(興道王)에 봉해졌으며 온 국민의 존경을 받다가 1300년에 사망했다. 사망 직전 베트남 황제에게 군대는 부모자식처럼 단결시키고 백성을 너그럽게 대하여 그 힘으로 대업을 이루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사후에는 흥도대왕(興道大王)으로 신격화되어 기일에는 대대적인 제사가 행해졌다. 지금도 베트남에는 방방곡곡에 쩐흥다오의 이름을 붙인 사당이나 거리가 즐비하다.

쩐흥다오는 사후에도 베트남에 큰 영향을 미쳤다. 20세기에는 호찌민(胡志明)이 쩐흥다오가 쓴 <병서요략(兵書要略)>을 베트콩의 주력 전략으로 채택해 큰 성과를 거뒀다. 1954년 베트남에서 프랑스 식민지배를 종식시킨 비엔디엔푸 전투의 영웅인 보 응웬 지압(武元甲) 장군도 쩐흥다오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현재의 중국보다 더 막강했던 원나라와 미국도 베트남에 패배했다. 베트남인의 혈관에는 지금도 쩐흥다오의 DNA가 면면히 흐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강대국도 국지전에선 베트남을 이길 수 있으나 전면전에선 이길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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