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동아시아 역사의 주역 동이족의 특징

 

모든 개인과 집단은 역사전쟁을 피할 수 없다. 이를 소홀히 하는 개인과 집단은 번성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민족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습관적으로 "반만년 역사" 운운한다. 그런데 실제 역사인식은 2천년 수준이다. 고구려, 신라, 백제로 구성되는 삼국시대부터 생각하기 때문이다. 삼국 이전의 고조선은 아직 우리 머리 속에 별로 없다.

우리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중국으로 시야를 돌려보자. 주나라 이전의 고대 중국은 크게 두 종족이 있었다. 하나는 동이족(東夷族)이고 또 하나는 화하족(華夏族)이다. 화하족은 오늘날 한족(漢族)의 원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우리는 동이족에 속한다.

한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은나라를 세운 민족이 상족(商族)이라는 동이족의 일파라는 사실은 이제 통설이다. 은의 국호가 오랫동안 상()이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화하족과 구별되는 동이족의 특징은 무엇일까. 첫 번째로 상투를 들 수 있다. 은의 마지막 수도였던 은허(殷墟)에서 상투 유물이 발견됐다. 상투는 한자에도 여러 흔적이 보인다. 상투틀 계이고 상투틀 계이다. 은 훗날 맺을 결로 변형됐다. 을 자세히 보면 상투를 틀어서 실로 묶은 모습인 것을 알 수 있다. 는 머리통이다. 는 상투다. 常套(상투)는 항상 쓰고다니는 것을 말한다. 갓 관()에도 에 상투의 흔적이 남아있다. 는 남자()의 머리에 동곳을 꽂아 상투를 만든 모습이다.

(설 립_stand)에도 상투가 솟아있지 않는가? 콩 두()로 알려진 머리 두로도 사용된다. 묘는 사람이 두 발로 서있고 머리()를 크게 그려놓은 다음에 그 위에 뭔가를 올려놓았다. 다름 아닌 상투일 것이다. 의 발음도 로 나는 것은 상투에서 나왔을 것 같다. 이렇게 한자에는 상투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머리를 틀어서 상투를 만든 것은 동이족의 고유풍습이기 때문이다.

동이족의 특징은 상투 외에도 많다. 중국 동북사범대학 이덕산(李德山) 교수가 1995<동북사대학보>에 발표한 논문 동북고민족 동이기원론에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많이 수록돼 있다. 이 교수는 <좌전>() 환공이 입조해 동이의 예를 취하여...”라는 기록을 예로 들어 동이가 자신들의 독특한 예절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대표적 사례가 쭈그려 앉는 것(무릎 꿇고 앉는 것)이다. 화하족은 이런 동이족의 예절을 무례하다 여겼다. <백호통의(白虎通義> ‘예악편(禮樂篇)’에는 동이족은 쭈그리고 앉으며 (화하족 입장에서 보면) 예의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논어> ‘헌문(憲問)’에는 원양(공자의 친구)이 동이의 예를 갖추어 기다렸다는 문장이 있다. 고위 관료 출신인 공자에게 원양은 친구이지만 무릎을 꿇고 맞이한 것이다. 그러자 공자는 친구의 무릎 꿇은 다리를 지팡이로 때리면서 그를 심하게 비난한다.

공자는 말년에 비록 자신이 상나라(은나라) 사람이라고 해 동이() 출신임을 밝히지만, 주나라의 제후국인 노나라의 관리가 된 이후 동이의 문화와 풍습에 대해 철저히 배척하는 자세를 보인다.

원양이사(原壤夷俟·원양이 무릎 꿇고 기다리다)’라는 고사로 알려진 이 이야기에 ()’라는 글자가 등장한다. 자에 대해 대해 주자는 오랑캐가 아니라 무릎 끓고 앉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는 의 의미에 신체(무릎)를 구부리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뜻한다.

<논어>에는 옷깃이 왼쪽으로 향하면 이를 좌임(左衽)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같은 책에 공자는 관중이 아니었으면 나는 머리를 풀고 옷을 왼쪽으로 돌려 입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 이는 중국에서 춘추전국시대(BC 8세기~BC 3세기)에 옷깃을 어느 방향으로 돌리는가에 따라 동이족과 화하족을 구분하고 있었던 사실을 말한다. 동이족에 속하는 은나라는 오른쪽 옷깃을 들어 왼쪽 옷깃 위로 올리는 좌임이 일반적이었다.

왜 좌임일까?

오른손잡이들이 활을 쏠 때 옷섶이 오른쪽에 있으면 불편하다. 활을 쏘아 화살이 손끝을 떠나는 순간, 화살끝이 오른쪽이 옷섶에 걸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좌임의 관습은 동이의 전통이 강한 고대 만주, 한반도 국가들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고구려 고분인 무용총(4세기)의 벽화를 보면 상류층부터 무사, 평민까지 모두 좌임을 한 옷을 입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후 한국은 전통적인 좌임에 중국식 우임을 함께 사용하다가, 당나라의 복식 영향을 많이 받은 통일신라시대(668~935) 이후 현재까지 우임으로 고정돼 한국 전통복장인 한복은 우임을 따르고 있다.

머리를 납작하게 만드는 편두(扁頭)’ 풍습도 있다. <후한서>는 진한(辰韓)사람들에 관해 아들을 낳으면 머리를 평평하게 만들려고 해 그것을 돌로 눌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청 시기(1368~1912)에 이 풍속은 만주에서 더욱 성행해 이를 수편두(편두 형태를 만들기 위한 잠)’라 불렀으며, 머리가 평평한 것이 아름답다고 여겼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청나라 건륭제의 어록이 기록돼 있다.

우리 왕조(청나라)의 옛 풍습에 아이가 태어난 후 며칠 동안 눕는 틀에 끼워 넣는데, 아이를 위로 보게 하고 그 속에 오랫동안 두면 머리가 저절로 평평해지고 무리가 마치 벽에 걸린 현판()처럼 보이게 된다.”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만주의 많은 민족들, 예를 들어 만주족, 혁철족(赫哲族), 몽골족, 악륜춘족(鄂倫春族) 등의 민족은 편두 풍속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인돌 장묘 풍습도 동이족의 주요 풍습이다. 고인돌(지석묘)은 지상에 서너 개의 돌판을 세우고 윗부분을 큰 돌판으로 덮어 만든 묘실이다. 산동 용산(龍山)문화 시기의 석곽묘는 대략 이런 장례 풍습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만주 지역은 대략 신석기시대 말기에서 춘추전국시대에 광범위하게 고인돌 묘지가 유행했다. 종류 또한 다양한데 돌판을 세워 깎은 묘라든가 돌덩이를 쌓아 올린 묘 등이 있다. 분포 범위는 요령성과 길림성 남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다. 또 내몽골 동부와 흑룡강성의 대부분 지역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 일대의 고구려, 발해 등의 민족은 모두 이런 종류의 장례 풍습이 유행했다. 고인돌 유적의 대표 지역은 한반도로, 동아시아 고인돌의 대부분이 한반도에 밀집돼 있다.

순장(殉葬) 풍습은 동이족, 흉노족의 고유 풍습으로 한국에서는 부여시대, 신라시대에까지 이어지며, 신라에서는 502년 공식적으로 폐지된다. 중국에서는 동이족 왕조인 은나라 때 대규모 순장이 이루어진다. 순장 풍습은 중국 동북지역 국가들에서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부여, 신라와 가야, 선비족의 나라인 요(거란), 몽골족의 원, 여진족의 청 등은 순장을 했던 동이족 후예의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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