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유신의 주역이면서 사사건건 대립

대한민국 최대 문제의 하나로 지역감정이 거론된다. 415 총선의 결과는 지역감정이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지역감정이 큰 문제인 건 맞지만 시야를 해외로 돌려보면 그리 절망할 일도 아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라마다 이런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웃나라 일본이 대표적인 사례다. 일본에도 라이벌 지역이 있다. 간사이(關西)와 간토(關東)는 한국에도 많이 알려져 있으니 길게 논하지 않겠다. 한국에 알려진 ‘겉다르고 속다르다’는 식의 부정적인 이미지의 일본인은 주로 간토 쪽이 많다는 것, 간사이는 한국인과 기질이 비슷하다는 것, 간토의 대표는 도쿄(東京), 간사이의 대표는 오사카(大阪)라는 것 정도만 언급할까 한다.

일본역사에서 과거의 라이벌은 더 흥미롭다. 대표적인 예로 사쓰마(薩摩)와 조슈(長州)를 들 수 있다. 이들 이름은 모두 에도(江戶)막부 시대 번()의 이름이다. 번은 다이묘(大名ㆍ영주)가 다스리는 반독립 제후국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최고권력자 쇼군(將軍)이 다스리는 중앙정부인 막부와 번을 합쳐서 막번(幕藩)체제라고 한다.

사쓰마는 지금의 가고시마(鹿兒島)현과, 조슈는 야마구치(山口)현과 대부분 영역이 겹친다. 가고시마는 규슈(九州), 야마구치는 일본 본토를 뜻하는 혼슈(本州)에 있다. 사쓰마와 조슈는 에도막부 말기 양대 유한(雄藩ㆍ세력이 큰 번이라는 뜻)에 속했다. 일본이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됐던 메이지(明治)유신은 두 지역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 번은 라이벌 의식이 강해 좀처럼 힘을 합치지 못했다. 이를 보다 못한 도사(土佐)(현재의 고치<高知>) 출신의 무사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두 번의 실질적인 최고지도자를 한자리에 모아놓고 동맹을 맺을 것을 종용해 성사시킨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삿쵸(薩長)동맹은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유신(1868)을 이루는 원동력이 됐다.

이들 두 번은 우리 역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쓰마는 임진왜란 때 남원을 공략해 도공을 대거 잡아갔다. 이 중 한 명이 한국에도 많이 알려진 심수관(壽官)이다. 사쓰마는 용맹함과 잔인함이 일본 으뜸이어서 임진왜란 때 우리를 가장 괴롭힌 존재이기도 하다. 조슈는 메이지유신 전후에 자주 제기됐던 정한론(征韓論)의 본거지다.

두 번의 라이벌 의식은 대단했다. 메이지유신 후 사쓰마벌(ㆍ패거리)은 해군을, 조슈벌은 육군을 각각 장악했다. 메이지유신 전에는 사쓰마의 힘이 더 컸으나, 메이지유신 후에는 일본 군부가 육군 위주로 움직이면서 육군을 장악한 조슈가 득세하게 된다. 이들의 경쟁의식이 어느 정도였냐 하면 두 지역 출신은 대장(大將) 발음도 달리 썼다. 대장의 일본 한자발음은 원래 타이쇼(たいしょう)가 표준발음이지만, 2차 대전 때까지 일본의 육군과 해군은 한쪽이 ‘타이쇼’라고 하면 다른 쪽에서는 ‘다이쇼(だいしょう)’라는 변칙 발음을 썼다. 우스갯소리로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패망 원인을 육군과 해군의 대립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일본 제국주의의 해외 진출과 관련, 조슈벌은 북방 진출론을, 사쓰마벌은 남방 진출론을 주장하며 사사건건 맞섰기 때문이다.

이들 지역은 메이지유신 이후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조슈는 총리만 해도 9명이나 되는데 한국인에게 익숙한 이름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등이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도 이곳 출신이다. 사쓰마 출신으로는 메이지유신 3대 주역 중 한 명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 초기 메이지 정부의 최고실력자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러·일전쟁 당시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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