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무령왕이 천자였다는 국뽕 주장을 반박한다

백제 무령왕이 천자였다고라?

오늘 자 어느 일간지 기고를 보면서 혀를 찼습니다.

지난 36일에 끝난 한 국립박물관의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특별전에 대해 어느 대학 교수(중문학 전공자)가 감상평을 썼는데, 글이 앞뒤가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교수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무령왕이 돌아갔다는 것을 무령왕릉 묘지석(죽은 이의 삶을 돌이나 토기 등에 기록해 무덤 안에 넣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붕은 천자가 죽었을 때를 표현한다. 제후는 ()’을 사용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왕의 죽음을 훙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런 까닭이다. 이는 무령왕이 (중국 황제와 비견되는) 천자였음을 말한다.’

실소를 금치 못했습니다.

무령왕릉 묘지석은 무령왕이 중국의 반쪽짜리 왕조의 신하임을 문장 제일 처음에 명확히 밝힌 뒤글을 풀고 있습니다. 교수 역시 무령왕릉 묘지석 전체 문장을 기고문에서 소개했음에도, 묘지석의 첫 문장은 아예 무시한 채 무령왕이 천자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검증하면 됩니다. 중문학 전공자인 교수도 기고문에서 기록했듯, 무령왕릉 묘지석의 첫 문장은 무령왕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

사마는 무령왕의 생전 이름입니다. ‘무령은 죽은 뒤에 사람들이 부른 이름, 즉 시호이고요. 그럼, 백제사마왕이라는 표현은, 사마라고 불린 백제왕이라는 뜻입니다. 한데 백제왕이라는 표현 앞에 영동대장군’, 즉 동쪽을 평안하게 다스리는 장군이라는 칭호가 왜 먼저 붙었을까요? 게다가 왕이 장군보다는 높은 계급인데, 왜 백제왕 앞에 장군 칭호가 먼저 나온 것일까요?

서기 521(무령왕 21) 무령왕은 당시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중국 왕조 중 남쪽을 지배했던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습니다. 양 고조는 이를 치하하기 위해 무령왕을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 百濟諸軍事 寧東大將軍)’에 책봉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도독이나 장군이라는 칭호는 죄다 중국의 황제를 모시는 벼슬아치입니다.

만약 백제인들이 백제가 중국과 완벽하게 대등한 나라라고 생각했다면 중국에서 내린 이런 벼슬을 가치 있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사신을 보내 조공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대등한 국가 간에 무슨 조공이 필요합니까?

그러나 무령왕을 무덤에 모신 백제 조정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백제왕이라는 표현 앞에 중국의 반쪽짜리 왕조에서 내린 벼슬 이름 중 영동대장군을 자랑스레 먼저 적었습니다. 중국의 반쪽짜리 왕조에서 내린 벼슬이 백제왕보다 더 앞서 내세울 만한 자랑스러운 것으로 생각한 셈이지요. 그래서 백제왕이라는 표현보다, ‘영동대장군이라는 중국에서 내린 벼슬이 더 앞에 나온 것입니다.

그럼에도 무령왕의 죽음을 이라고 표현했으니, 무령왕이 천자라고요? 그럼 천자 앞에 붙은 장군이라는 칭호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되는 건가요?

중문과 교수가 국뽕에 빠져 살든 말든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 주변에 한둘이 아니니까...

하지만 이런 글이 세계와 경쟁할 우리 미래 세대에게 아무런 교정 과정 없이 전달되는 것에는 두려움조차 갖습니다. 갈라파고스에 갇혀서 아전인수에 빠진 이들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모든 역사는 한국사를 중심으로 돈다는 식의 한국사 천동설에서 허우적대는 한국사 교육을 지금처럼 강화하느니, 차라리 한국사 교육을 폐지하라고 외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해당 교수의 글 한 번 보시지요.

photo 신형준 페이스북
photo 신형준 페이스북

코로나 시국과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로 차일피일하다가 턱걸이로 마지막 날에 관람을 마쳤다.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주최한 '무령왕릉 발굴 50년 특별전' 얘기다. 작년 9월부터 시작한 전시를 마감날인 이달 6일에야 갔으니, 길을 나서면서 스스로도 한심해서 혀를 차기 바빴다.

 

무령왕(462523, 재위 501523)은 중국과 일본의 역사에도 기록이 많이 나온다. 일본에서 출생한 무령왕은 그 생애가 드라마틱하고 족적도 뚜렷하다. 유명한 기록 중 하나가 중국 정사 '양서(梁書) 백제전' 521년에 나오는 "다시 강국이 되었다(更爲强國)"고 선언한 대목이다. 작년은 '갱위강국'을 선언한 지 1500년이었다.

 

무령왕릉은 1971년 발굴됐는데, 고대사 연구에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유물의 화려함이나 축조의 정교함은 물론이거니와, 삼국시대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무덤 주인공의 신분이 확실히 기록된 무령왕과 무령왕비의 묘지석이 나왔기 때문이다.

 

기실 필자도 이 묘지석을 보기 위해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씨체와 내용도 직접 보고 싶었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자료 사진을 보면 묘지석 앞면에 구멍이 있는 것 같은데 실제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뒤까지 뚫려 있는 건지 분간이 힘들었다. 직접 확인해보니 왕과 왕비의 묘지석 모두 앞에서 뒤까지 관통하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현재까지 그 용도는 추측만 할 뿐이다.

 

왕의 묘지석에는 이렇게 써있다.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는 계묘년(523) 57일 임진날에 돌아가셔서(七月壬辰崩), 을사년(525) 812일 갑신날에 이르러 대묘에 예를 갖추어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

 

원문의 '()'에 눈길이 간다. '예기(禮記)''춘추(春秋)'에 따르면 망자의 신분에 따라 용어와 장례 기간을 달리해야 한다. 천자(天子)가 죽으면 붕(), 제후(諸侯)가 죽으면 훙(), 대부(大夫)가 죽으면 졸(), ()가 죽으면 불록(不祿)이라고 한다.

 

천자는 왜 ''이라고 하는가. 높은 것, 두터운 것, 존귀한 것이 허물어지는 것을 ''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무령왕에게 ''을 쓴 것은 그의 신분을 알려준다. 조선 임금이 사망하면 왕조실록은 예외 없이 ''을 썼다. 3(정확히 27개월)이 지나서 매장하는가. 나라가 넓기 때문이다. 즉 제후들이 와서 문상할 시간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시절 통신과 교통에 따른 규정이다. 폐언하면, 무령왕은 넓은 나라를 다스린 천자였다.

 

전시실을 나서는데 유리옥(琉璃玉)이 보였다. 분석 결과 원료에 포함된 납의 산지가 태국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백제가 누비던 바다는 얼마나 넓었는지 상상해 보았다.

 

무령왕은 한국사에만 속한 분이 아니다. 20011223일 아키히토(明仁) 당시 일왕은 68세 생일을 맞아 왕실에서 기자회견을 갖는 자리에서 "나 자신으로서는 간무(桓武) 일왕(737806, 재위 781806)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200483일에는 아키히토 일왕의 5촌 당숙이자 일본 왕족인 아사카노 마사히코(朝香誠彦)씨가 수행원과 친척 2명만 데리고 무령왕릉을 찾아 참배하고 간 사실이 이튿날 공주시의 발표로 알려졌다.(2015.6.25.동아일보) 일본 왕실이 무령왕을 조상으로 여기는 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선언한 무령왕을 기리며, 우리나라도 강국이 되었다고 선언하는 그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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