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 출신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 '전두환을 위한 변명' 제기해 눈길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이 지난 1021최보식의 언론에 기고한 전두환 관련 글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이때는 윤석열 국민의힘 예비후보(당시) 전두환 발언으로 십자포화를 맞던 시절이다. 김대호 소장은 82학번으로 위장취업 혐의로 구속됐던 운동권 출신이다. 다음은 기고문 전문(全文). /편집자 주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photo 팍스뉴스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photo 팍스뉴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역사 왜곡·무지·조작과 식자들의 비겁·위선을 보고 몇 자 더 쓴다.

 

1982년 대학생이 되고 나서 그해 겨울쯤부터 였나, 아무튼 1980년대 중반까지 내 애창곡은 어두운 죽음의 시대였다. 막걸리잔 앞에 놓고 참 구성지게 잘 불렀다. 그때 들어준 사람이 지금의 아내다.

 

19862월 집시법으로 구속되어 성동구치소에 수감돼 있을 때 5월 빵투(감방투쟁) 과정에서 제가 주로 외친 구호가 (5·18 직후 광주시민들이 외쳤다던) "전두환을 찢어죽이자" 였다. 교도관들과 재소자들이 그 구호는 너무 심하다고 말렸다. 물론 나는 말린다고 들을 사람이 아니다. 내 분노와 증오를 함축한 구호였다.

 

솔직히 그때는 하도 수감된 학생들이 많아(각 사, 각 층마다 최소 1명 이상이 있었음) ‘빵투했다고 징벌방에 끌려가지도 않았다. 사회 분위기도 우리를 지지하고 엄호했다.

 

당시 나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교도관들이나 일반 잡범 재소자들은 독립투사들이 옥고를 치른다고 생각하고, 나중에 크게 출세할 사람으로 대우했다. 감옥은 정말 학교였고 별은 훈장이었다. 1심 집유(징역 16, 집유 3)로 출감하고 나왔더니, 운동권은 훨씬 급진화·좌경화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들어가야 운동 좀 했다고 대접해주는 분위기였다.

 

누가 뭐래도 전두환 때가 살기 좋았다는 얘기를 처음 들은 것은 1990년대 후반부터였던 것같다. 내 청춘의 투쟁을 부정하는 얘기였는데,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처음 들었다. 물론 나는 당혹스러웠다. 그런데 그 이후 정말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들었다. 주로 사업하는 사람, 장사하는 사람들이었다.

 

2006년부터 사회디자인연구소를 하면서 수많은 국가 통계(경제사회 지표)를 뜯어봤는데, 과연 1980년대는 지속적으로 거의 모든 경제사회 지표가 좋아졌다. 성장은 물론이고 분배 지표도 좋아졌다. 처음에는 성장기 유소년의 체력과 체구처럼 전두환이 때를 잘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한참 뒤에 당시 환경, 위기와 대응(정책)을 살펴보니 단순히 운만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며칠 전 ‘100인 포럼에서 손명원 대표(전 쌍용자동차 사장)와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199478일 김일성이 죽기 1주일 전에 김일성과 만나 긴 얘기를 나누었다고 했다. 합쳐서 김일성을 7~8번 만났다고 한다. 아마 이분이 김일성이 생명의 은인으로 여겼다는 손정도 목사의 조카쯤 되는 모양이다.

 

이분 얘기에 따르면, 김일성은 해방 직후만 하더라도 북한이 남한이나 중국보다 훨씬 잘 살았는데, 지금(1990년대 초)은 북한이 가장 못사는 현실을 매우 괴로워하고, 남북 협력에서 돌파구를 열려고 했다. 남한과의 대화와 협력을 간구한 것은 김일성이었다는 것이다. 이분 말씀을 포함하여 다양한 채널로부터 들려온 얘기를 종합하면, 당시 김일성은 거대한 체제 전환을 도모한 것 같다.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그야말로 황무지에서 혁명·운동을 한 1세대는 혁명·운동의 목적과 소명을 강하게 의식한다. 이념이나 이론은 방편이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라고, 모든 이론은 실천을 통해 검증해서 수정보완하거나 폐기해야 할 가설 정도로 여긴다. 레닌, 트로츠키, 부하린, 김일성, 등소평, 강철 김영환, 장기표, 저 같은 사람에게는 이게 상식이다. 김대중과 노무현도 대동소이할 거다. 당연히 함부로 세상과 사람을 선악, 정사(正邪), 정의·불의를 재단하지 않고, 유연하다. 무엇보다도 실천적 성과·결과 앞에 머리를 숙인다. 이게 김대중, 노무현이 전두환을 깍듯이 예우했던 이유일 거다.(19882월 퇴임한 전두환이 김대중 시절이 제일 편했다고 회고록에 썼다)

 

그런데 혁명·운동 2세대와 3세대는 이념과 이론은 금과옥조가 되고, 체제는 거대한 기득권을 정당화하는 장치가 된다. 대부분은 왜 혁명·운동을 했는지, 왜 이런 체제를 채택했는지 묻지 않는다.

 

과거 역사는 정치적 취사선택과 침소봉대 편집을 거쳐, 인물이나 체제는 우상화·신성화되거나 악마화·부역자화된다. 5·18은 신성화되고, 전두환은 악마화되었다. 김구는 신성화되고, 김성수는 친일부역자가 되었다.

 

요 며칠간 전두환을 히틀러, 민정당을 나치당과 비슷한 반열에 놓는 논객들을 많이 본다. 생년과 이력을 보니 1980년 이후에 태어났거나 1980년 당시 유치원생 정도였던 사람들이 참 많다.

 

대학 캠퍼스를 전대협·한총련 운동권이 장악한 시대(198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녔고, 그 이후 역사와 현실을 비판적으로 사고해본 적이 없는 운동권 박수부대들이 참 많다. 역사 인식의 파괴력을 절감한다. 전두환 시대에 20대를 보낸 사람이라 할지라도, 살면서 장사하는 사람이나 사업하는 사람의 애환을 알지 못하는 강단 교수, 변호사, 논객, 정치컨설턴트들도 많다.

 

일제 시대에 대한 인식과 전두환 시대에 대한 인식은 비슷한 측면이 많다. 동시대 살았던 사람들이 두 눈으로 본 역사와 현실을, 해방 투쟁도 민주 투쟁도 해 보지 않고, 먹고 사는(가족 먹여 살리는) 투쟁도 해 보지 않은 외눈박이 식자들과 논객들에 의해, 또 정치적 경쟁 상대를 악마화하지 않으면 정당성을 획득할 수 없는 비루하고 무능한 정치 세력에 의해 왜곡·조작되고 있다.

 

조국 교수처럼 전두환 시대를 히틀러·나치 시대와 동일시하면서도, 당시 데모 한번, 구류, 구속, 제적, 징계 한번 당해 보지 않은 자들이 전두환을 악마시하는 것을 보면 정말 역겹다. 경제 현실과 민중의 삶과 괴리된 외눈박이 식자들의 관념 유희가 걱정스럽다.

 

마지막 남은 도피처는 당신(윤석열) 말이 다 옳아도 그래도 지금은 선거 시기니까 대중의 정서를 고려해야 하지 않나 이 말일 거다.

 

전두환을 언급하려면 다른 모든 것은 다 엉망이었지만, 한두 개는 잘한 것이 있다는 식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말 일거다. 12·12, 5·17 쿠데타, 5·18 등 몇 개 빼놓고 잘한 것 많다고 하면 전두환 찬양이 되니까. 정치적 언어 구사에서 조금은 현명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발언 철회와 사과하지 않는다고 무슨 큰 죄를 지은 것처럼 여기는 것은 정말 아니다.

 

그리고 적어도 전두환 시대를 어두운 죽음의 시대라면서, 러시아 10월 혁명이나 제26·25(북한과 남한 혁명세력의 연합에 의한 미제 축출 파쇼정권 타도)를 지향했던 사람들은 전두환 신원(伸冤)에 적극 나서야 하지 않을까 싶다. 1988년 미얀마 88 항쟁 및 그 결말과 비교하면 대한민국은 전두환의 과를 잊어서도 안되지만, (경제발전, 자유화, 자율화 조치와 6·29와 평화적 정권교체)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전두환을 악마화하면서 자신의 모든 시대착오적인 행위의 면죄부를 받으려는 짓은 정말 비열하다.

 

참고로 나는 당시 대부분의 열혈 운동권들처럼, 또 한번 광주에서처럼 군홧발로 민주주의를 짓밟는 사태가 생긴다면, 기꺼이 총을 들고 싸우다 죽는다는 다짐은 수없이 했다. 하지만 주사파나 PD파의 혁명 전략에는 전혀 동조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 이력에는 국가보안법 위반이 없는 것이다.

 

전두환은 신원이 필요하다. 최소한 정치적으로 과도하게 무시돼왔던 전두환 시대의 빛을 얘기하는 사람들을 비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 시대를 살아보았고, 군사독재 타도 투쟁도 해 보았고, 지금 민생의 지독한 고통과 청년의 절망을 아는 사람이라면.

/ 박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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