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비드 19 부스터 샷 예약을 한 날, 외국 언론 기고를 읽으면서...

오늘 아침, 코비드 19 부스터 샷 예약을 했습니다. 빨리 맞기를 바랐지만, 2차 접종 뒤 딱 5개월째 되는 내년 24일 이후 맞으라고 정부가 운영하는 국민비서 구삐가 알려주었습니다. 하여 가장 빠른 시간인 24일 오전 11시에 맞기로 했습니다.

 

지난 두 차례의 백신 접종에서 저는 아무런 부작용이 없었습니다. 두 번째 맞은 것은 팔이 묵직한 증상조차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 주변에서는 심한 부작용을 호소하는 이가 적지 않았습니다.

 

며칠 꼼짝도 못 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을 정도로 아팠다.

(백신을 맞은 지 두 달이 지나도록) 몸에 통증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분에게 저는 그리 말합니다.

 

맞지 마세요. 다 살자고 하는 것인데, 그런 통증을 감수하면서 맞을 이유가 있을까요?”

 

제가 여전히 기억하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제대하고 복학한 19882학기, 러시아사를 가르치시는 이인호 선생님에게서 들었던 이야기였습니다. 당시 중국과 북한의 사회주의에 경도된 학생들이 많은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시면서 하신 말씀이었지요.

 

사회주의는 자유주의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나라에서는 절대로 성공하지 못하는 제도입니다.”

 

종의 당좌를 세게 때리는 당목(撞木)에 맞은 것처럼 제 머리에는 큰 울림이 생겼습니다.

 

개인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개인의 합’(그것이 단순한 총합일지, 시너지 효과를 통해 합이 배가 될지는 논외로 합니다.)일 수밖에 없는 사회나 국가를 제대로 운영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돈오돈수의 순간처럼, 그때 개인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국민학교(저는 초등학교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5학년 무렵 국민교육헌장을 외운 이후, 저는 가 아닌 우리모든 올바른 판단의 주어로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의 모든 주어는 우리혹은 나라입니다. ‘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등장하는 게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였는데, 이 역시 나라보다 못한 하위개념입니다.

 

이인호 선생님의 가르침은 그런 점에서, ‘의 중요성, 개인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계기였지요. 얼치기 사회주의자에서 자유주의자로 저를 확실하게 변신시킨 계기는 이인호 선생님의 강의를 들은 그날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뒤 줄곧 개인의 가치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자로 저 스스로를 생각했습니다. 한데, 지난해 코비드 19 사태 이후, 저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에 의문을 던지게 하는 계기가 생겼습니다.

 

지난해 3, 코비드 19를 잡기 위해 정부는 강력한 통제 정책을 세웠습니다. 초기에는 확진자에 대한 동선 공개까지 했지요. 어느덧 사회인으로 성장한 제 아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아부지, 솔직히 어디서 걸린 건지 명확히 알 수 있어? 다 추정 아니야? 왜 동선 검증에서 대중교통은 제외하지? 마스크만 쓰면 정말로 괜찮은 거야? 그럼 마스크를 쓰고 출입한 상점도 제외해야지. 그 사람이 부도덕한 일을 해서 걸린 것도 아니고, 호흡기를 통해 전염되는 질병인데, 왜 개인의 동선까지 공개하면서 개인의 사생활을 노출 혹은 침해하려고 하지?”

 

당시 저는 전쟁이나 이에 준하는 상황이라면, 공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는 침해될 수 있다고 했지만, 충격은 적잖았습니다.

 

, 아해는 국민교육헌장 세대가 아니로구나. 아해는 나처럼 공()을 사()보다 무조건 앞세우는 게 아니로구나.

 

이제 코비드 19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어언 2년이 됩니다. 백신만 맞으면 괜찮을 것 같았지만 이제 돌파 감염은 뉴스거리도 안 됩니다. 부스터 샷을 매년 2회 맞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 역시 부스터 샷 예약을 한 것이고요.

 

지금까지는 두 차례 접종을 마치지 않으면 사회 생활에서 제약이 있었지만, 앞으로는 매년 두 차례 부스터 샷을 맞지 않으면 제약이 따르게 될 것처럼 보입니다.

 

한데요, 정말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건가요? 코비드 19 백신을 맞았다가 돌아간 사람이 제 주변에도 있습니다. 제 혈육 중에도 백신을 맞고 며칠 고생한 사람도 있고요. 한데 백신 맞고 사망한 사람에게 돌아오는 답은 백신과 사망은 인과 관계 없음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 모든 개인이 다 백신을 맞아야 하는 것인가요? 백신을 맞아도 돌파 감염이 이리 쉽게 되는데, ‘개인적 이유로 백신을 맞지 않았다고 사회적 제재를 받는 게 과연 올바른 것인가요? 공을 위해 사는 희생돼도 그만인 건가요? 더 나아가, 모임을 통제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자영업자들의 고통은 누가 보상해 줄 수 있나요?

 

의료 전문가가 아니기에, 이 문제에 대해 제 개인의 의견을 지나치게 내세우는 것은 지양하도록 하겠습니다. 코비드 19와 관련해서 공적 의견을 내시는 대한민국 최고 의료 전문가들이 거의 100% ‘사회적 통제 강화를 외치시는데 제가 무슨 말을 더 할까요?

 

한데, 영국에서는 이런 의견도 있습니다. Fraser Nelson이라는 ‘The Spectator’의 편집장이 지난 2일 영국 언론 텔리그라프에 기고한 글입니다. 정치 분야 전문 기자인 넬슨은 이리 이야기합니다.

 

1. 백신이 중증을 막아주는 효과가 있지만, 동시에 돌파 감염을 막는 데는 큰 효과가 없음을 알 수 있다.

2. 사정이 이런데, 무조건 사람 모임을 통제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3. 백신 접종 반대 운동을 하는 이들이 소외계층이 많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넬슨은 유럽 각국은 물론, 지난해 (각종 통제 정책보다는) 집단 면역을 진행했던 스웨덴조차 요즘은 통제 강화 정책으로 가고 있는데, 영국은 부스터 샷의 효과를 기대하면서 유럽의 통제 우선 정책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며 이에 대한 지지를 표했습니다.

 

의료 전문가가 아니기에, 저는 넬슨의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 논할 능력이 없습니다. 코비드 19와 관련해서 공적 발언을 하시는 대한민국 의료 전문가 중 거의 100% 통제 강화를 이야기하시니, ‘그런가 보다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왜 대한민국에서는 넬슨과 같은 이야기가 소위 공적 담론의 장에 나오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과문한 탓인지, ‘사회적 통제 강화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자영업자 님들의 시위에서나 들어본 것 같아서입니다.

 

넬슨의 이야기가 텔리그라프에 실릴 수 있는 것은 영국이 극도의 개인주의 국가여서인가요, 아니면 우리가 알게 모르게 여전히 국민교육헌장, 혹은 사()보다는 공()을 앞세우는 유교의 영향력 아래 있기 때문인 것인가요?

넬슨의 텔리그라프 기고문 이미지 photo 신형준
넬슨의 텔리그라프 기고문 이미지 photo 신형준

넬슨의 글 한 번 시간 되면 읽어보십시오. ‘이런 저런 사정’(?)으로 텔리그라프 기고문이 실린 어느 사이트를 우선 소개합니다.

https://games4you.me/europes-omicron-panic-has-left-the-continent-in-a-very-dark-place/

 

만약 텔리그라프 링크를 원하시면 여기를 누르시면 됩니다.

 

https://www.telegraph.co.uk/news/2021/12/02/europes-omicron-panic-has-left-continent-dark-place/

신형준 캐리커처 photo 신형준 페이스북
신형준 캐리커처 photo 신형준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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